•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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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셋 모옴이 “천재라 부르기에 합당한 인물”이라 일컬었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의 <프랑도르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교회를 비꼰 작품으로 같은 취향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읽을 수 있는 <대심문관>과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발자크를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의 이견이 있을 것이나, 어디 그를 두고서만 그럴까. 이름 있다는 목사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겠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가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프랑도르의 예수>는 중세에 일어났다는 사건을 그린 내용이라 현대인의 입맛에는 진부할 수도 있을 것이나, 작품이 쓰인 1831년 2월은 “7월 혁명(1830)”직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 우리 교회 현실과의 비교에서 적잖은 것을 건질 수 있으리라.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는 프랑도르에서 멀지 않는 한 섬과 바다가 무대가 된다. 배 한 척이 나그네들을 섬에서 뭍으로 실어 나를 참. 선원은 늦게 오는 사람들을 재촉하는 뿔 나팔을 불어댄다. 그날의 마지막 배였기 때문이다. 승객이 배를 채우고, 선원이 밧줄을 끌러 출항하려 할 즈음에야 낯선 사나이가 나타난다. 배 뒤 쪽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은 그가 그들 틈에 자리 차지를 못하도록 분주하게 설쳐댔다. 그들은 부자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높은 신분의 프랑도르 귀족 넷과 젊은 남자 귀족과 그의 연인,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신부님, 그리고 무기를 지닌 호위 병사를 대동한 부자가 꽤 무거워 보이는 돈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곁에는 레벤대학의 학자와 조교가 자리했고.  
낯선 사나이가 배 뒤쪽에서는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앞쪽으로 가는데, 거기 승객들은 그에게 자리를 비워주며 공손하게 맞아들인다. 그러는 것을 보는 뒤쪽 사람들 틈에서는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 앞 쪽에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든 병사에 아이 딸린 술집 여인, 아들을 데리고 가는 농부, 나이든 거렁벵이 여인 등. 그들 틈에 뒤늦게 자리를 잡은 사나이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돌렸다.
선원들이 밧줄을 풀고 항해사가 키를 잡으면서 노를 젓는 이들에게 큰 소리로 호령했다. “서둘러라. 속도를 높여라!”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를 젓는 선원들은 힘껏 속도를 올리려 안감힘을 쓴다. 그러나 뭍 가까이에 다가왔을 무렵에는 무서운 폭풍이 배를 들이치는가 싶더니 항해사의 탁월한 솜씨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배는 전복하고 만다.  
바로 그 때 그 낯선 사나이가 배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따라오시오!” 사나이는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파도 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배 앞쪽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따라 그와 같이 바다 위를 걸어갔다. 항해사는 배에 매달려 애쓰고 있었고, 부자는 허겁지겁 돈이 든 자루를 둘러메고 가려다가 그 자루와 함께 물에 빠져 버렸다. 교양 있는 사나이는 “사기꾼을 따라 바다를 걸어갈 수 있다는 사나이의 말을 믿는 바보들”을 비웃다가 그도 덮치는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젊은 귀족 여인은 애인에게 매달려 그를 따라 깊은 바다로 빨려 들어갔고, 신부와 늙은 귀부인은 불신앙의 무거운 짐으로 해서 바다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뭍에 이르렀을 때는 앞서가던 사나이는 이미 보이지가 않았다. 항해사는 널빤지를 붙들고 간신히 깃에 도착했지만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낯선 사나이가 그를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낯선 사나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이 땅에 찾아온 일었다.”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발자크는 썼다. “사람들은 이제 믿지 않는다.” 또 “믿는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발자크는 현실을 아름답게 보다는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기에 자연주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세속화되어가는 당시의 낙관주의와 자본주의를 자연주의적인 시각으로 그리려 했다. 또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돈이 모든 것이다.”라는 당시의 풍조였다. <두르의 신부>와 같은 작품에서 보여주듯 발자크는 교회의 권위주의와 권력투쟁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자신은 신앙인이라 믿고 있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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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프랑도르의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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