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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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교회에서 은퇴한 목회자와 교회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권력의 자리에서 은퇴한 목회자에게 그동안 억압되었던 신도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 목회자의 은퇴식은 마치 왕의 퇴임식 같았는데, 왕좌에서 내려오자마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흔히들 권력의 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요란하다. 마치 한국교회의 모퉁이 기둥이 꺾기는 듯하다. 지금까지 찬란했던 한국교회의 영광은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 더욱 확실하다. 우리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은 기독TV에 출연하고 있는 스타들마저도 바로 그 뒤를 연이을 것이란 추측 때문이다.
이러한 소식이 한국 교계에 들려질 때마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의 눈에 영화장면 같이 선하게 떠오른다. 모세는 눈도 밝고 치아도 건강하고 마음마저도 총기가 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는 물론 명예와 권력을 모두 여호수아에게 넘기고, 느보산에 올라 이 땅을 미련 없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모세의 삶을 오늘 또 다시 되새김은, 과거 우리가 가난할 적에 느끼던 느낌과는 달리,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가 더욱 놀라운 인격을 갖추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기 때문이다.
모세는 불행한 삶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왕의 무덤이나 도시를 짓는 히브리노예 가운데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노예 인구소멸정책으로 인해서 죽음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집트 궁의 공주에게 건짐을 받아 양육되었다. 태중에서 어머니가 느끼던 불안감과 두려움, 사람들의 환영도 받지 못한 긴장상태에서 제대로 울어 보질 못하였다. 아마도 모세가 말을 어눌하게 하게 되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주 취약한 공포의 상태에서 숨을 죽이며 아이를 키우던 그의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되자, 아이를 단념하고 광주리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어 보낸다.
모세는 여러 번 버림을 받았다. 생모로부터의 버림받음, 양육한 어머니와 주변의 가족들과 함께 공부한 동료들로부터도 떠나야 했다. 모세가 그의 안락한 이기적인 삶에서 그의 바깥 주변의 노예들에게 까지도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40이 되어서야 비롯되었다. 링컨대통령은 40이 넘어서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모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 곧 얼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세가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그가 처한 세상에 도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변화만 있었을 뿐, 더 이상 진전하질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잠시 빗겨날 수밖에 없었다.
모세에게서 진정한 삶의 변화는 광야에서 빚어졌다. 흔히들 광야에서 인물이 난다고 하질 않던가? 모세는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야훼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는 인생 80의 나이였으나 비로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다시 일어서서, 노예로 신음하는 치유 받지 못하고 있는 땅을 향해서 나아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종교가 정의를 바로 잡질 아니하고 권력의 시녀 노릇만을 한다면 그 종교는 흔히들 말하는 정적인 권력자의 탐욕의 도구일 뿐이다.
어디 이 뿐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단련된 지도력이 발휘되길 시작 하였다. 그는 궁궐에서 많은 실력을 갖춘 자이긴 하였어도, 그가 발휘하는 능력은 세속적인 지식의 활용이 아닌, 하나님과의 조우에서 얻어진 지도력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열개로 나눠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얼마나 그 펀치가 절제가 있던지, 이집트의 군사력이 당해내질 못하였다.
지도력은 전쟁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세의 백성들은 노예출신이라서 상처가 치유되질 아니하여서 성격화된 데다가, 부정적 사고와 행태는 도저히 하나님나라를 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도 실패를 하질 아니하고 백성들과도 거리감을 두질 아니하였다. 그에게서의 카리스마란 겸손과 온유함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백성들 가운데에 있는 장막에, 하나님도 내려오신 것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성숙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8년의 광야생활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에 그의 행렬은 모압과의 경계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우물 하나를 발견하였지만 메마른 우물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둘러서더니 합창을 시작하였다. ‘우물물아 솟아나라’. 경이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거룩과 성장이 지도자에게서 백성들에게로 옮겨간 것이었다. 모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연연하질 아니하고 느보산에서 그를 보냈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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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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