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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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독일 속담에 `한 부모가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그렇다. 이는 사랑이나 인정(人情)은 본디부터 지녀 오는 사람의 마음이기에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는 쉬워도 역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수직적인 관계에 기인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어버이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다는 의미로 예기(禮記)에 나온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으므로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 하고 효도하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면서 사회가 존속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현상을 보기도 하고 과거 전래 생활 풍습에서 보기도 하였다.
실로 사랑과 효도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여질 때 빛이 난다. 그런데 사랑과 효도는 달리 이상하게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내리사랑은 그 도가 지나쳐 자녀를 나약하게 하고 버릇없는 아이로 길러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치사랑은 교육을 통하여, 서책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조장하여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로 오늘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성서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무조건 주는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가페가 사랑받을만 한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에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담는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쫓겨나거나 자신의 권력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에 포기만큼 적당한 단어는 없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드러난 권력 포기의 명백한 모습이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의 삶은 이러한 포기를 드러냈으며 이 포기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포기의 지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이어진다.
예수는 삶 속에서 죽음을 실현하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꽃피움으로써 죽는 방법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갖 능력을 드러낸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無力)하게 잡히고 무력하게 십자가를 진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무력은 예수가 생명을 얻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기도하러 올라간 겟세마네에서 무장한 적들에게 잡힌다.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은 요란한 무기를 들고 예수에게 왔다. 예수는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순수하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히 이러한 내어줌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결코 자포자기나 절망과는 다르다. 예수는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나눔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 피조 세계에 내재하는 분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임재하는 분으로, 그리고 역사에 개입하고 활동하는 분으로,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가 지니는 목적은 성령에 의한 섭리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현존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나타나고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 이전에는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택, 구원, 계약과 섭리적인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나 결혼관계의 사랑에 견주어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성서에서 누가는 사랑의 속성을 누가복음서에 나타내 보인다. 서두에 해당하는 눅2:14의 천사찬송 구절 속에 예수 탄생의 전체적 의미와 활동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이렇게 담고 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기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만드는 수직적 기능을 수행하려고 이 땅에 왔다는 점에 유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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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과 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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