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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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믿는 이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삶에서 펼쳐지는 <바로 지금 이순간>의 성례일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풀 한 포기에서도, 호박꽃 하나에서도 특별한 기적의 선물을 받는다. 딱이 영혼에 발맞추어 가지 않아도, 일상의 순간순간 그분께서 숨겨놓으신 암호 요 수수께끼 같은 신비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순간 옷깃을 여기며 놀람과 경외로 성스런 예배가 된다.
이번 여름에도 더할 나위 없는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남은 결코 혼자 이루어질 수 없는, 너와 나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가슴이 뛴다. 심장이 뛴다. 새삼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보다 먼저 올 봄, 연두빛이 세상을 물들이던 때, 옛 영화 <마음의 행로>에서의 주인공 같았던 그 장소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욱 그랬을까?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가 궁금했던 주인공 남자. 희미하게 아물아물 기억이 날 것만 같은,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 막연하게나마 호주머니의 그 열쇠가 그 모든 것을 열어 줄 열쇠라는 예감. 나 역시 그랬다. 한참을 마음의 열쇠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내 삶의 시간 속  골목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나 자신 알 수 없는, 그러나 확실히 실재해 있는 나.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선명한 답 없이 속절없이 계절이 바뀌었다.
한여름, 새벽. 그곳은 물안개가 곱게 피어나고 있었다. 하얀 백일홍나무 꽃과 호수는 벌써 몇 달째 손잡고 그들만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친구인 듯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가 솟구쳐 올랐다. 그 옆엔 오리가 물살과 함께 춤추듯 미끄러져 가고….
다시 <마음의 행로>. 결국 그 열쇠의 비밀이 풀린다. 여주인공의 그를 향한 사랑과 헌신과 인내의 기다림은, 서서히 그로 하여금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 열쇠가 바로 둘이 행복하게 살았던 자신들의 집의 열쇠임을 알게 된다. 해피 엔딩의 참 예쁜 영화다.
기억상실. 한번의 해리증상을 겪은 나로선 충분히 공감이 간다.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일어날 수 있는 …. 그러나 공감 가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때다, 바로 그때.
하늘수박꽃. 통상 박과의 호박꽃이나 수박꽃이 노란색인 데 비해 백색이다. 흰 실타래처럼 생긴 여러 가닥의 꽃실이 특이하게 붙어 있다. 언뜻 술패랭이 사촌 같기도 하다.  처음 보았을 땐 봉오리를 오므린 채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문 새침떼기 같아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고 싶은 뭔가 있는 듯했다. 열려 있지 않은 마음, 그래서 그냥 지나쳤다.
반전, 반전이었다. 새벽에 만난 하늘수박꽃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오므렸던 입술을 온통 다 열어젖히고 드러내다 못해 다섯 갈래로 풀어헤쳐진 채 완전히 탈진되어 하늘 향해 누워 있었다. 아니 도대체 한여름밤에 뭘 한 거야? 남몰래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달빛이 너무 환했나? 별빛이 고혹스러웠나?  아님 찬 이슬에 기절했나?
그때 다시 호수에 신비한 색상을 띤 안개가 피어올랐다.  “들어봐, 내 말이 들리지 않니? 내 목소리는 아주 세미해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못 듣는단다. 그앤 이름대로 피어난 거야. ”
어디선가 깊은, 그러나 생생한 노래가 떨림 속에 들려 왔다. 내가 그토록 찾던 열쇠의 답이다. 지금까지 나의 잊었던 기억을 스스로 되살리기까지 참고 기다려 주신 아버지, 그분의 음성이다. 서로 가슴을 주려무나. 서로 손을 잡고. 그러나 기대는 하지 마. 오직 너희를 지은 내  손길에게만 기대를 하렴.  
올 한여름에 하늘호박꽃이 내게 선물로 들려준다.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닌 묵상이라며. 이것또한 아버지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바로 이순간의 성례>다. 그래서 늘 신비이신 분.
다시 한여름 새벽에 하늘호박꽃이 말한다.  “나도 너도 하늘 향해 열려 있어야 해. 왜냐하면 우린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으니까…. 나처럼 봉오리를 오무리지 마. 그러면 호수를, 나무를, 하늘을 비추어내지 못해. 바보처럼 해가 진 뒤에야 깨달았단다. 얼른 내 몸을 영혼을 다 열었어. 그리고 뭐 했냐구? 하늘 향해 못다 한 춤추어댔어. 그 후 어느새 여러 갈래로 상하고 찢어져 가는 하늘 세마포 입은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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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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