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기독교언론의 훌륭한 생각 일반에 전달할 기회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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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지로서 초교파 교계언론은
예언자적 사명과 감시자적 사명, 그리고
화해자적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언론에 대한 사명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도 따른다.

본보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는 사시 아래 에큐메니칼지를 표방하고, 지난 25년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만을 생각하며, 외부의 공격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한국교회를 위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하지만 본보의 노력과는 달리 교계는 시간이 갈수록 연합보다는 분열을, 화해보다는 다툼과 반목으로 일관하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질수록 등불은 그 빛이 빛나고, 삭막한 빈들에서 나팔소리는 더욱 멀리 퍼지듯, 한국교회가 위기를 느낄 수록 교계언론의 역할 역시 증대해간다고 믿는다.
이에 본보는 한국교회 1세대 언론인으로 현재까지도 교회의 개혁과 언론의 발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남식 목사를 만나 고언을 들었다.

△강춘오 목사(이하 강): 지금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도전을 받으며 위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교계언론이 감당해야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교단이기주의에 가로막혀 교계연합지의 설자리는 매우 좁아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계언론의 원로로부터 그 역할에 대해 듣고 싶다.  
△김남식 목사(이하 김): 교계언론은 한국교회를 위한 정화의 등불이다. 교계언론은 한국교회의 분명한 일원이지만, 때로는 한국교회를 사심없이 바라볼 수 있는 제3자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언론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언제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과 유지해야 하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계언론은 특정교단이나 취재대상과 너무 가깝게 지내고 있다. 특히 교계에 몸을 담고 있는 특성상 교계언론은 위의 원칙을 더욱 충실히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교계언론만이 가지는 온전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강: 교계언론의 온전한 사명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김: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첫째는 예언자적 사명이다. 교계언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갈 길을 교회와 세상을 향해 제시해야 하는 역할이다. 둘째는 감시자적 사명이다. 여러 가지 불법과 부정에 대해 교계언론은 늘 감시의 역할을 쉬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화해자적 사명이다. 화해는 기독교가 중요시하는 사랑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이는 교계언론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강: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인데, 김 목사님의 현역 시절 교계언론은 어떠했나?
△김: 내가 처음 교계언론과 관련을 맺은게 1965년으로 올해 딱 60년이 된다. 당시 교계언론은 크리스챤신문, 교회연합신보(현 기독교신문), 복음신문, 기독신보(현 기독신문), 기독공보 등이었다. 앞의 세 개는 연합지라고 할 수 있고, 뒤의 두 개는 교단지이다. 그런데 이때는 교계언론인들이 자기 사명감과 투지에 넘쳐 어떠한 경우에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외칠 때였다. 내가 속한 곳이 합동측 교단지인 기독신보였는데, 우리는 당시 교단지임에도 어떤 교권의 지배도 받지 않았으며, 우리가 내고 싶은 목소리를 다 냈었다.  
△강: 교단지가 교단의 지배를 받지 않고 기사를 자유로이 생산했다는 것인가?
△김: 당시에는 그랬다. 예를 들어 ‘정신 빠진 재단 이사회’란 제목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는데, 이 기사로 인해 재단 이사회가 새롭게 꾸려졌다. 교단지이기에 오히려 교단에 대한 감시자적 역할을 더욱 충실해 했다.
△강: 교단의 테두리 안에 있는데, 어찌 그게 가능했나? 최근 한 대교단에서 총회연금 문제로 심각한 분쟁이 일어 쌍방 기자회견을 가지는 등 난리가 났는데도 그 교단지가 제대로 기사를 반영하지 않았다. 그게 교단지이다.
△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단지이지만 교단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보니 아무리 교단이 대상이라도 눈치 볼 필요 없이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보니 신문을 다 찍어놓고 돈이 없어 인쇄소에서 신문을 못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기자들이 여기 저기 돈을 구하러 다니는 일도 허다했다. 그래도 편집의 독립권이 보장됐기에 그걸로 족했다.  
△강: 지금으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계언론은 어떻게 보는가?
△김: 지금은 교계도 인터넷 언론이 생기면서 많은 종류의 교계언론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교단지도 수십 종이고, 하지만 그 중에 제대로 언론기능을 하는 것이 몇 군데나 되는지는 좀 생각해 봐야 한다. 교단지는 이미 언론이라기보다는 교단 홍보지로 전락했다. 특히 대형 교단 교단지들은 노회들을 한 바퀴만 돌아도 광고가 넘쳐나다 보니, 지면에 다뤄야 할 것은 다루지 않고, 편집방향도 파벌중심으로 흐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교계와 언론간의 구조가 정작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연합지에는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연합지가 그나마 언론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지만, 점차 교단지 위주로 형성되는 광고시장은 결국 건강한 연합지를 고사시키게 될 것이다.
△강: 이미 그런 현상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요즘은 교단 뿐만 아니라 연합단체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연합단체는 우선 연합지를 챙겨야 함이 마땅함에도, 그 단체에 속한 회원 교단의 교단지를 우선적으로 챙긴다. 그러다보니 감시기능은 사라지고 홍보매체만이 돌아다니는 꼴이다.
△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계에 가감없이 쓴소리를 뱉을 수 있는 강한 연합지의 육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교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론을 육성하고, 언론은 교회의 건강성을 지켜야 한다. 교계언론이 특정 목회자들의 비리나 쫓아다니며 거래를 하는 것은 '사이비짓'이다. 교계 전체를 보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사를 쓰야 한다.
△강: 요즘 취재를 다니다 보면, 연합단체나 대형교단에서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주최자들의 결정이기에 이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네 교단지나 우군으로 여기는 언론에는 취재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특정언론에 대한 통제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김: 언론사별 취재를 구분해 허용하는 것은 그 집단이 스스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더구나 여타 언론의 출입을 통제한 채, 자기네 홍보가 가능한 교단지나 친언론만을 취재에 대동한다는 것은 사실을 호도할 가능성도 있는 일이다. 이는 교계가 분명히 제고해야 할 부분이다.
△강: 한국교회의 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 특히 최근 갖가지 현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심각히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교계언론은 이를 화해시킬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 사실 한국교회 내 대립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50~60년대부터 진보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은 꾸준히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대립의 골을 좁히지 못해 갈라지지 않았나?
문제는 과연 그렇게 대립해야 할 가치가 있었느냐는 부분이다. 예전에는 진보와 보수가 각각의 분명한 사상을 갖고 맞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정체성이 있는가? 지금은 보수도, 진보도, 사상도 없다. 그런데도 갈라진다. 이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NCCK는 본질적으로 정체성이 완전히 다른 단체다. 그런데 특정 교단은 한기총과  NCCK 모두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신학의 부재다. 그 교단의 정체성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진보와 보수를 하나로 아우른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교계는 반목했고, 분열을 거듭했다. 명예욕과 자리 갈라먹기(다툼), 논쟁 아닌 투쟁이다.
△강: 지금의 교계 분열을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패거리들’의 세속적 이해 관계가 교계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옳을 것이다.
△김: 그렇게 볼 수 있다. 결국 분열이라는 죄를 그들 스스로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신학적 부재에 있고, 여기에 돈과 자리를 탐하는 목회자들의 그릇된 세속적 욕심이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강: 교회연합신문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린다.
△김: 매주 교회연합신문을 열독하는 독자로서, 신문 안에 교계의 소식뿐 아니라, 교계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날카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교회연합신문을 봐야 교계 돌아가는 소식을 알 정도다. 내가 본 교회연합신문은 정론지로 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언론이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는 사시처럼, 앞으로도 교회를 위한 정론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달라.
이제는 교계언론이 교계라는 틀을 벗어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동안 언론법의 규제로 교계 안에 너무 오래 갇혀 있다 보니, 기독교 언론이 가진 훌륭한 생각을 일반에 전달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교계언론이라 할지라도 기사의 범위를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분야로 넓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성경적이어야 하며, 일반 언론과는 다른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강: 예전에는 교계언론도 일반 분야를 다룰 때가 있었다. 지금도 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교계언론의 열악한 취재여건이다. 가뜩이나 경영난에 시달리는 교계언론의 현실에서 다양한 분야를 다루기에는 인력도 재정도 너무도 부족하다.
△김: 물론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계언론은 분야별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협력체제로 대사회적 영향을 제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언론시장에서 각각의 신문사 간의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이제는 교계 안에서의 경쟁만을 생각지 말고, 일반언론과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 중에는 사회, 정치, 경제, 법률 등의 출중한 전문가들이 즐비하다. 교계언론이 그들을 활용해 국민들을 향해 기독교적 해석을 선보인다면, 굉장한 반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담 강춘오 발행인/ 정리 차진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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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5주년 특집대담/ 김남식 목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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