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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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하나의 장로교단으로 시작된 한국장로교는 딱 1백년만에 300개 교단으로 나뉘었다. 원인은 단 한 가지, 일제하에 저지른 신사참배 문제를 해방 후 '회개'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개신교회와 한국 개신교회는 그 처지가 비슷했다. 둘 다 정치권력의 어용교회로 전락한 것이다. 독일교회는 90% 이상이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니뮬러와 본훼퍼, 그리고 칼 바르트 등이 이끈 고백교회는 채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교회는 정치권력의 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나치권력에 협력을 반대했다.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구속되거나 사형당했다.
◇처음에는 일제에 항거해 온 한국교회는 식민지배가 길어지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장로교가 앞장 서서 1938년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반대세력은 기껏 50%도 되지 않았다. 총회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일뿐, 종교적 행위가 아니므로 죄가 아나라고 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앞에 절하는 행위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 행위라고 맞섰다. 그리하여 신사참배 반대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고, 교단에서는 목사직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종전(終戰)이 없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사형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그 범죄 행위에 대한 회개 과정이다. 독일교회는 1945년 히틀러 정권이 몰락하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나치의 어용교회(DC: 독일기독교도)를 부정하고, 고백교회를 중심한 독일복음주의교회(EKD)를 설립했다. EKD는 1948년 루터의 고향인 아이제나흐에서 모여 루터파, 개혁파, 연합파 교회들의 연맹임을 천명했다. 이후 독일교회는 이 바르멘 신학선언과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의 정신아래 결속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달랐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나 죄책고백도 없었고, 신학선언도 없었다. '옥중성도'(獄中聖徒)라고 불리운 신사참배 반대파의 회개와 자숙 촉구에도, 한국교회는 반대했다. 신사참배 지지자들은 오히려 신사참배 반대파를 교단에서 몰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48년에 신사참배 반대파로 구성된 고신측이 분열했다. 그리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하고, 1959에는 합동과 통합이 분열하고, 1979년에는 합동측이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한 이후, 명분 없는 핵분열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300여 개에 이르는 장로교단이 생겨났다.
◇장로교가 70%에 이르는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하 신사참배로 신앙의 정통성을 상실한 세력이 교회의 대표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헌법상 양심의 자유는 무시되고, 교권주의가 극대화 되어, 노회와 총회의 지상주의가 만연했다. 그리하여 노회나 총회의 결의가 곧 진리가 되었다. 노회나 총회의 결의는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규범이 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31장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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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300개 교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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