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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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치를 준비하려는 이들은, 항상 그 잔치에 오시는 손님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에 관하여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1995년에 숙대 출신들이 모교 방문을 위한 잔치를 힐튼 호텔에서 벌였을 때에, 그 예측된 2500명의 오차가 두세 명이었다고 하였는데, 이 수치는 거의 선지자의 통찰력만큼이나 예리한 이경숙 총장만이 할 수 있었던 예측이라 하겠다. 어느 잔치에서는 손님이 예상보다 적게 오는 바람에 잔치 음식이 풍성하게 남아서 가져가는 경우도 있지만, 손님들이 예상을 뒤엎고 두세 배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그 오신 손님들에게 얼마나 누가 될 것인가는 경험해본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
집을 떠난 지 이미 두 달이 넘었을 때이다. 예수가 자신의 집안에 혼례식이 있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고향 근처 가나동리 혼인잔칫집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아뿔사! 혼인집에 있어야할 포도주가 바닥을 들어낸 것이었다. 기적의 이야기를 일곱 개로 추려서 절제 있는 펀치를 날리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서기관은, 그 첫 번째 기적의 펀치를, 포도주가 떨어진 혼례식의 이야기로 날린 것이다. 모세가 날린 열 가지 기적의 펀치가 질서 있고 절제되어 있는 펀치라면, 요한 서기관의 일곱 개의 기적은, 한 민족의 이야기를 세계 인류의 구원 이야기로 업그레이드 시킨 이야기이다.
혼례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당시 종교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소진시켰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 당시의 모든 백성이 세상 살아가는 재미를 이미 상실한 상태라는 것을 시사한다. 영화 장면에서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기를 보라! 가장 상황이 어려워져서 모든 관객이, 이 문제를 반전 시킬 자를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시기가 아니던가?
주후 90년, 요한의 복음서가 태동되던 시기는 그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패망하고 성전마저 무너진 채, 이스라엘의 시민들은 노예로 끌려갔거나, 유대지방 근처의 변방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복음을 전하던 이들 대다수가 이미 순교를 당했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교회의 전열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변화를 꾀하고 탈바꿈한 것은, 유대교가 성전중심의 교회에서 율법중심의 회당교회로 전환되었고, 성전제사제도가 사라지고 회당예배가 유대인의 종교전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은 구약성경을 재정비하게 이르렀고,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서를 내놓아야 하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 마태복음 등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멸망 이후 10년에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는, 일곱 교회가 이미 쇠락하고 있었던 터이라서, 이를 수습하질 않으면 아니 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묵시록이 기록된 지 10년, 우린 현재 요한계시록을 성경의 끝에 두었지만, 실제 시간적으로는 요한의 복음서가 제일 마지막에 기록되었다. 요한은 모든 복음서와 성경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교회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으며, 교회의 결정들이 성경에서 떠나 이단아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독선에 빠지고 지도력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곁길로 들어선 교회주의가 복음을 왜곡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요한에게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포도주가 떨어진 쇠락한 유대종교를 지명한 것이지만, 시간적으로는 당시 A.D. 90년대의 교회를 시사한다. 예수께서 새로운 포도주를 제공하시면서, 다시금 잔칫집에 흥을 돋워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이 세우시는 그의 교회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우리 교회가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처럼, 포도주가 떨어진, 흥을 잃은 잔칫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이 흥이 깨어진 잔치를, 어떻게 다시 일깨워서, 신명나는 잔칫집으로 만들 것인가? 복음서를 우리에게 보낸 요한은 그 해답을 이미 알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서두에 “너희는 더 큰 것을 보리라” 하였는데, 그가 이렇게 선언함은, 사마리아 성을 겹겹이 둘러쌓은 적군을 보고서 놀란 게하시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열어준 나머지 평안과 희락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게하시가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수를 읽게 되었던 때문이리라. 이 같이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 한국교회를 알아차린 지도자라면, 칼빈보다도 더 큰 수를 읽고, 더 좋은 포도주로, 더 큰 연회를 배설할 수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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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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