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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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로마사회에서 ‘불법적 종교’로 박해받던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합법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자 바로 직전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2) 황제의 박해 시절에 그 박해에 굴복한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내어놓으라는 당국의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을 거부하고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고, 마지 못해 성경을 넘겨 준 자들도 있었다. 당국과 타협한 자들은 분노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타협하지 않은 자들은 타협한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세력은 갈라져 서로를 비난하며 싸웠다. 거기에 당국이 몰수했던 교회 건물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주라는 황제의 명령이 나오자 그 건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기독교는 박해 아래 있어서 한번도 전체회의를 통한 교리를 확정하지 못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기독론’이었다. 나사렛 예수가 과연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성부)과 똑같은 신(神)이냐, 아니면 하나님보다는 좀 낮은 단계의 신(神)이냐(아리우스주의)를 놓고 갈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그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세례를 받은 것은 33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공의회의 결과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공표됐다. 그럼에도 제국의 절반은 아리우스주의를 선호했다.
◇공의회 이후 양쪽은 서로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며 죽였다. 366년에는 한 교회에서만 서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137명이나 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3만명이 죽었다.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200년이 지난 527년에 왕좌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아리우스파인 반달 족과 북유럽의 고트 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했다. 그 시대 최고의 군사적 천재였던 벨리사리우스는 끝까지 아리우스주의를 고집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몰아 5년여에 걸쳐 모두 죽였다. 그래도 아리우스주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유스티아누스는 기독교를 거부한 제국내 엄청난 수의 이교도들도 모두 죽였다.
◇이는 초기 기독교가 '교리'를 바로 세운다는 미명하에 저지른 불관용이 낳은 비극이다. 이후에도 기독교는 이단 논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불태워 죽이고, 물에 빠트려 죽이고, 고문해 죽였다. 2000년의 방대한 교회사에는 페이지마다 그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오늘날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교회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을 뿐, 자신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아 사회적 종교적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그러면 이단으로 몰린 그들은 사회적 활동이나 결혼, 가족 관계 등에 엄청난 불이익을 당한다. 거기에 교회사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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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불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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