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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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가지려 한다. 이는 구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삶에 의미를 가지려 한다. 삶이 힘이 들고 무기력 해 질 때 늘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묻는다. 이는 여기에서 세상사는 힘이 이 때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이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듯이 그것은 대속(代贖) )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요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하심을 볼 수 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는 중심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가 믿는 도리를 십자가의 도리를 '십자가의 말씀'이라 한다(고전1:18).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 되었을 때 정치적인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이는 자기의 목숨을 온 세상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드리우게 된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가로놓인 죄를 용서하심이요 사랑의 증거요 화해의 역사라는 것으로 구원의 반열에 앉게 하심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교의 복음은 가로막힌 사이의 관계를 십자가로 화해로 구원에 이르게 함을 믿게 한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게 될 때에 세상 여론이 예수 자신을 누구라 하더냐? 하는 물음에 제자들이 들려주는 말은 세례 요한,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하니,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말씀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씀이 끝나기도 바쁘게 주님은 자기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말씀 하시기를 “인자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비로소 예수께서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열어 보이신다. 여기에 베드로의 반응은 육적인 축복으로 받은 은혜만을 생각한 정도의 고백을 하게 된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반응이시다. 마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의 유혹처럼 느끼는 점에 단호함을 보이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고난은 이기적인 고난도 아니고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는 그러한 수난도 아니다. 그는 수탈당한 민중(百姓=나라의 근본)을 보고 깔보고 억누르고 있는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하는 기존의 사탄 세력에 고난을 당한 이의 형편을 돕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의 모습이 십자가의 고난에 숨겨져 있다.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으로 사랑의 낮은 자리로 옮기심을 보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일어 난 구원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이 하늘 공간에 계신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계시면서 현재의 삶에서 나타내 보이시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역사의 현재 속으로 바로 지금 오시고 이 삶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데 삶 속에서 감정과 이성이 늘 따른다. 여기에 그 삶이 순간적인 감정에 휘말리기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선택의 요구를 하게 되는 일을 여기서 경험하게 된다. 예컨대 이것이 이치에 맞는 행동일까? 하는 삶의 물음에 놓이게 된다. 이때 이는 본질적인가? 이치에 맞는 행동인가? 하는 물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비우는 선택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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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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