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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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안악 출신
임택권(林澤權, 1885~1950)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임택권은 어릴적부터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를 배우며 유교(儒敎)를 숭상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소안론(Rev. Willian L. Swalen, 蘇安論 1865~1954. 5. 8)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임택권은 당시 소안론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소안론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1892년 11월 래한 서울 선교부에 소속되었다. 이듬해 1893년 1월 관서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받고 평양지방 선교사업에 집중하다가 나중엔 평양주재 선교사가 되었다.
1894년에는 잠시 강원도 원산 선교부에 파송되어 순회전도에 몰두하면서 교육활동에도 기여하였다. 1899년에는 다시 평양 선교부로 돌아와 숭실학교 관리 책임자가 되어 학교발전과 교육선교에도 이받이 했다.
또한 소안론은 1901년에는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기 이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長老會公議會)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내한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제하기도 하고, 선교지 활동상황을 점검하는 책임을 지며 교회행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03년 1월에는 마포삼열(Samuel Moffett)과 베어드(William M Baird)와 함께 평양신학교 개교에 힘을 모아 전도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착수했다. 소안론은 1932년에 필생을 다해 선교사역에 매진했던 조선선교를 마감하고 귀국한 조선선교사역 초기에 큰 자취를 남겼다.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받아
임택권은 1902년도에 자기를 기독교로 이끈 소안론 선교사에게서 세례(洗禮)를 받았으며, 그의 신앙성장에 기대를 건 소안론 선교사는 자신이 인도하고 있는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사경회(査經會)에 열심히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그 결과 그는 소안론 선교사에게 지도자가 될 소양을 인정받고 소안론 선교사의 당회구역을 보살피는 조사(助師)로 채용되어 소안론과 함께 순회조사(巡會助師)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소안론 선교사는 그의 조직적인 사고와 두뇌를 인정하게 되었고, 또 그의 적극적인 복음사역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안신학교(安信學校) 교장으로 임명하여 일하게 하였다.

소안론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며 신학교 다녀
임택권 청년 조사의 적극적인 활동에 감동한 소안론 선교사는 그를 자신의 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시켰다. 임택권 청년은 직분이 순회조사였기에 신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소안론의 당회구역을 순행하면서 학습자와 세례자 교육에 힘썼다. 소안론 선교사가 만들어 준 일정표에 따라 학습과 세례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 시켰다.
이렇게 열심으로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빈틈없이 일한 보람으로 소안론 선교사의 마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학교가 개교되면 임택권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이리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모두 이수한 임택권 조사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교회의 청빙을 받아 1914년 가을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은율읍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 유학
그러나 임택권 목사는 다시 깊이있는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일본 고배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로 가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특별히 미국 선교사 홀튼(Fulton) 교수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매력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후일에 고백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20년 부터는 황해도 재령읍 서부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목회하였으며, 1924년 임택권 교장은 목사 신분이었기에 교내 채플(chaple)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꿈과 이상을 신앙으로 심어 줄려고 애를 썼으며 이로써 학생들에게 기독교적인 인격 도야을 위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가 총회장으로 선출된 제1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25년 9월 12일부터 18일까지 평양서부교회에서 목사총대 82명, 장로총대 78명(4명 미참), 선교사 대표 34명이 모여 개회되었다. 이자익(李自益) 목사가 성경 요한복음 10장 1~10절을 봉독한 후 ‘우리의 좋은 목자는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였다

불신자를 위한 목사의 결혼 주례 금지
임택권 목사의 재임시 총회 결의 사항을 몇가지 언급하면, ① 지금까지 지켜오던 꽃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해 부르기로 하다. ② 미션학교(Mission School)는 반드시 교목을 두어 성경을 가르치기로 하다. ③ 중학교에는 목회자 자녀들이 입학할 경우 수업료(修業料)를 면제해 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기로 하다. ④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 다른 교파로 이적해 가는 교인들은 제적하기로 하고, 철저한 장로교회 요리문답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인 관리에 철저를 기하기로 가결하였다. ⑤ 한센씨병 근절을 위한 근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⑥ 간도노회를 동만노회(東滿老會)로 이름을 변경하기로 하다. ⑦ 함북노회(咸北老會)를 분립(함북·함중)키로 하다. ⑧ 불신자를 위한 목사의 결혼 주례는 불허하기로 하다. ⑨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재단법인화 하기로 하다.

한국 최초 신학자 남궁혁 박사를 초빙
이외에도 최초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한국인 신학자 남궁혁(南宮爀) 박사를 신약학(新約學) 교수로 부임해 취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낭궁혁 박사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직영하는 리치몬드(Richmond)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Semirary)를 졸업하였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취임하게 되었다. 이 일로 지금까지 미국 선교사들이 독점했던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가 점점 변화 발전해 가는 모습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남궁혁 박사는 1882년 7월 1일 서울 출생으로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귀국, 최초의 한국인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한국인 교수로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남궁혁 박사는 1932년 21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1938년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조치가 내리자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 8월 해방이 되기까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귀국해서는 교회연합사업을 위해 오늘의 NCC 로 불리우는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총무직을 맡아 봉사하던 중 1950년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고 말았다.

신천군 사평교회 재임 중 6.25 와중에 행방불명
임택권 목사는 총회장으로서 임기를 마치고서 1926년 명신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재령읍 서부교회(西部敎會)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연구하기를 좋아해 서부교회를 맡아 시무하면서도 1928년엔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간 목회에 대한 연구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9년에는 신천군 사평교회로 임지를 옮겨 목회를 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로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전쟁의 와중에 1.4후퇴시에 월남한 장로교 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기독교연맹(朝鮮基督敎聯盟)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고 학살 당하였을 것이라고 전해 주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 한국교회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많은 지도자들의 상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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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14회 총회장 임택권(林澤權)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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