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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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출신으로 배재학당 졸업
남궁혁(南宮爀, 1882.7.1.~1950.?) 목사는 경성(서울)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는 1881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교회사가 김수진 박사), 필자는 1979년 간행된 한국기독교순교사를 쓴 김광수(金光洙) 박사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
그는 어릴 때 한문서숙(漢文書塾)에 입학해 당시의 교육제도를 따라 인문교육을 받았다. 그의 가문은 한말 애국자요, 양반가문에서 큰 어려움 없이 부모슬하에서 자랐으며, 머리가 총명해 백일장에 나가 그의 글이 통과되는 영광도 얻었다.
그는 한문수학을 한 터여서 신학문에도 관심이 있던 차에 마침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해 서양 문물과 언어에 매력을 느끼고 졸업하자마자 인천세관에 관리로 취직하였다. 이 때가 1901년이었다.
잠시 세관원으로 이곳에서 일하다가 1903년에는 전라도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나 경성을 떠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마 9:9)를 부르신 것처럼 남궁혁이 목포에 와서 처음 만났던 외국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선교하고 있던 변요한(Rev. John Fairman, Preston 邊要翰, 1875~1975. 4.30) 선교사였다. 그는 변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는 목포 양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훈련을 받고 있던 중 선교사의 권고로 그 좋은 목포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하고, 목포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영흥학교(永興學校) 영어선생으로 취직하였다.

선교사들이 세운 영흥학교 영어선생
당시 세관원의 월급이 70원이었는데 영흥학교의 월급은 40원이었으니 갑지가 생활비가 3분의 1이나 줄었던 것이다. 이때 자기를 지도해 주고 돌보아 주던 변요한 선교사가 1909년 광주에 있는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장으로 가면서 남궁혁은 변요한 선교사의 요청으로 숭일학교 학감으로 옮겨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 현 광주제일교회) 출석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 교회 장로장립을 받았다.
1917년에는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목사가 된 후에는 광주양림교회를 시무하였다. 그는 신학교 입학 전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영어실력이 뛰어나 젊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연이 되어 1922년 그는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기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1918년에 이기풍 목사가 갑자기 목소리(성대)에 이상이 생겨 전남노회(全南老會)에 휴직을 청원하게 되어 노회의 허락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이기풍 목사 대신 강단에 서서 설교를 대행하기도 했다.

프린스톤신학교와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졸업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서울, 정주, 대구를 위시 전국으로 확산되지 남궁혁도 학생들과 만세운동 모의를 한 혐의로 잠시 일경(日警)에 의해 구금되기도 하였으나 곧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입학하기에도 힘든 장로교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신학교(Prinseton Seminary)로 가서 공부한 결과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이어 리치몬드(Richmond)에 있는 유니온신학교(Union Seminary)로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약학(新約學)을 전공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낭궁혁은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도 북문안교회의 노라복(Rev. Knox. Rovert)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일하면서 노라복 선교사의 통역을 맡아하기도 했다.
남궁혁 목사는 드디어 학업을 다 마치고 1925년 귀국하게 되는데, 입국하자마자 평양 장로회신학교 모교에서 한국인 최초 신약학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정식 신학박사로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게 되자 학생들에게 큰 인기만 아니라 선배로서 한국교회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교수에 전념하면서 다른 한편 성경번역과 주석사업에도 착수하였으며, 동시에 신학교 전문 학술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의 일도 맡았다.


신학지남 편집인으로 활동
그는 또 후배들을 퍽이나 사랑한 도량있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자기집에서 환영 만찬을 하면서 신학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고, 김재준(金在俊) 박사의 생계를 위해서도 염려하였고, 이성휘(李聖徽) 박사, 송창근(宋昌槿) 박사 등 후배들의 진로를 후원해 줌으로써 한국교계가 크게 활기를 띄게 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그의 가슴은 넓고 따뜻했고 포용력이 컸다. 이로 인하여 동역자로부터 자유주의(自由主義)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1948년 제3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때 이자익 총회장으로부터 설교요청을 받고 총대들을 향해 “신학(神學) 싸움에 선교사들이 어느 한 편에 치우치면 한국교회는 분열될 우려가 있다”고 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그는 한국교회의 분열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미리 진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인물 중에는 보수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한국교회 미래와 앞날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싱해 임시정부로 망명 거류민 단장
1938년 9월 2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사실상 학교는 폐교상태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대혼란의 시기였으며 명망있는 교회지도자들에게 일제 당국으로부터 회유와 여러가지 모양의 유혹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궁혁 목사는 신사참배에 동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큰 결심을 하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곳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조국광복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1945년에 접어들자 그곳에 망명 중이던 남궁혁 목사는 “조선인 거류민 단장”이 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보살피며 지내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이듬해 많은 조선인 거류민들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미 군청청 장관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赤産管理處長)에 취임하였다. 잠시 후엔 재무부 세관국장(稅關局長)의 직임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속에서 더이상 몸담고 싶지않아 1948년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194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 하여 남산(南山)에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가 개교될 무렵이었다. 박형룡 박사가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때 그는 “나는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의 신앙을 의심한 사람도 있었으나 남궁혁 박사는 이미 한국교회의 분열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애국지사 이승만 박사가 일제와 싸우다가 망명길을 떠나면서 남궁혁 목사의 집에 와 신세를 진바 있었으나 그는 그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의 신세를 지려고 아니한 큰 위인이었다.
1932년 그는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9일~16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모인 제2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총대로는 목사 72명, 장로 72명(미참 9명 포함), 선교사 37명이 참석해 개회되었다.
중요 결의사항으로는 ① 비총대라도 총회상비부 회원은 될 수 있게 결의하다. ② 경기노회를 분리하기로 가결하다.(경기· 경청노회) ③ 신자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신앙생활(信仰生活)지를 창간하기로 하다. ④ 기독교교육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종교교육을 지도하기로 하다.
남궁혁 목사는 부총회장을 거치지 않고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고 장로회신학교 교수신분으로 교단 행정직인 총회장으로 선임된 경우는 마포삼열(Samel A, Moffett) 박사 이후 두번째였다. 그가 총회장으로 선임된 후 9월 14일에 토마스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토마스선교사 기념교회>를 헌당하는 일이 있었다.

6.25 와중에 납북돼 생사 불명
1938년 9월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4개 선교부(미국북, 미국남, 호주, 카나다)와 함께 운영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자진 폐교하고 선교사 교수들은 모두 철수하였다.
남궁혁 목사는 다른 직책들은 고사하였으나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총무의 일을 1948년까지 봉사하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1950년 6월 25일 남북의 전쟁 와중에 북괴에 의해 납북된 후 그의 생사를 알수 없게 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북한에서 종교인들, 특히 교회지도자들에게 가한 핍박과 회유에 응하지 않아 많은 납북 교회지도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한국기독교순교사, 김광수 저, 1979 한국교회사연구원 p190~1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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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제21회 총회장 남궁혁(南宮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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