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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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가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였음은 무엇을 말함일까? 이는 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마태복음서가 이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훈련된 제자를 양성하라는 뜻일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 또한 그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기저를 둔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한 기도로서 구성되었기에, 이 기도에 적합한 인격과 성품과 열매를 이루는 훈련이 필수적으로 따랐을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마태의 주장대로 남을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제자들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앞질러야 한다는 것인 만큼, 그 뜻하는 바를 제자들은 확실하게 인지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에서와 요한복음에서도 상세히 나타내고 있는 바, ‘안다’라는 뜻은 여간 안다고 해서는 ‘안다’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우리네가 요즈음 악성 댓글 루머 등과 같이, 그렇고 그런 수준에서의 가벼운 앎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앎은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과 훈련이 중첩되어서 쌓아진, 신뢰가 형성된 앎을 지칭하기도 하고, 한 젊은 부부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깊은 관계를 맺은 나머지, 아이를 낳는 관계에 이룸을 말한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고’에서, 이 ‘안다’는 말이 ‘동침하다’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면, 소문으로 들었거나 거짓 의도를 지닌 악성 루머에 현혹되어 갖추어진 지식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리라.
그래서 복음서의 청중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복음 전달자들을 보았을 때에, 그들의 리프서비스 같은 말재간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와 삶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을 보고, 복음을 제대로 소화하여서 가르치는 바가 흔들림이 없고, 성령께서도 그들의 말씀 사역에 동참하여 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그리스도의 복음’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식 중에는 학습된 지식도 있고, 경험적인 지식도 있으나, 훈련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못하는 지식이 있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해서 실질적으로 얻는 지식과, 전도하는 사례를 읽거나 듣고서 얻은 지식은 확실하게 차이가 있어서, 그 간격은 오로지 실습과 훈련으로 메워지는 것이라서, 연습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터득하지 못하는 지식이다. 펜싱 같은 경기가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예로, 어느 교회가, 그 교회 구성원에 침투된 적의 첩자를 인지하는 데에 게으른 나머지, 그 첩자가 뿌려놓은 악성 루머나, 그 첩자가 중심 지도권에까지 접근되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교회의 문을 닫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그 교회가 도덕적인 부문에서도 노출되었겠으나, 특히 계시적인 지식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이 운행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 교회를 떠난 경우라면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적어도 교회가 교회되려면 음부의 권세에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이 말씀하시는 바에 예민하게 응답하는, 계시적인 지식도 갖추어져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신 전도자들은, 이에 적합하게, 복음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과 열매도 갖추어서, 저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는 안정된 든든함이 있었던 것이다. 흔한 예로, 우리가 신학을 갖추면 다 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어왔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선 복음 전달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도 바르게 잘 전하였지만, 복음이 선포 될 때에 성령의 나타남 까지 융합되어 있었고,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갈 때에 있었던 계시적인 지식까지도 구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으로 바르게 학습된 훈련된 제자란,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님나라 안으로 인도한다 함은, 곧 그리스도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오는 것이며,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치료할 줄 안다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란 인격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귀신을 결박하고 내어 쫓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지수가 OECD국가 중에서 36위로 뒤쳐져 있고,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은 것은, 현대의 복음 전달자들의 훈련됨이 초대교회보다 뒤처져있음이 아닐까? 오늘의 교회만큼 갈등의 골이 깊고, 집단화된 이기주의가 이렇게 팽배하게 된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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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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