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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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울진군 평해 출신
홍종필(洪鍾弼: 1887.9.24~1935.5.29) 목사는 지금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해 있으나, 당시 강원도 울진군 평해(平海)에서 홍재찬(洪在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한양에서 진사(眞士)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릴 때 한양에서 한성측량학교(漢成測量學校)를 졸업하였다.  13세 때 숙부(叔父) 홍재신(洪在信) 문하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1906년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일제의 횡포로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사촌형 홍종익(洪鍾翊)과 함께 한양에서 낙향해 간 곳이 전라북도 익산군 옹포면 재리였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터전을 내렸는데 농토(農土)를 마련해 생활터전을 넓혀 나가는데 성공해 그는 1년에 500석을 생산하는 중농(重農)으로 발돋음해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지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치안(治安)이 문란해 밤이면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생활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얼마 전 개항이 된 군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우연히 최홍서 조사를 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출석한 교회가 군산개복교회였다. 이때 마침 김필수(金弼秀) 목사가 개복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집례로 두 형제가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들은 재력가여서 교회를 신축할 때 금전적으로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개복동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군산 개복교회 2대 장로로 안수
당시 상황을 1928년 총회에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 275p.)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群山郡 開福洞敎會에서 金弼秀 牧師로 委任하고 洪鍾翊을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로 組職하고 其後 牧師는 李元弼,  洪鍾弼, 長老는 洪鍾弼, 朴春五, 梁錫柱, 洪仁元 等이 次第視務하니라>.
이렇게 교회 건축하는 일과 봉사에 전력한 결과 그의 형인 홍종익은 개복교회 초대장로가 되었고 홍종필은 양석주와 함께 개복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던 것이다.
홍종필 장로는 머리가 명석하여 1916년 전북노회에서 장로로써 노회서기가 되기도 했고, 담임목사였던 김필수 목사의 많은 영향을 받아 1917년에는 자기 교회의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5년 간의 신학수업을 잘 마치고 1923년 신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군산 개복교회의 청빙을 받아 전북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받아 모교회에서 영광스러운 목회사역을 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그 후에도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김필수 목사(1915, 제4회 총회장 역임)의 후광을 받으며 전북노회 안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때문에 동료 목사나 장로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아 목사안수 받은지 1년만에 전북노회 노회장이 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서기, 이듬해(1924) 회록서기, 1927년에는 서기로 두 해나 봉사하였다. 홍종필 목사만큼 총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감연합공의회 이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편집위원, 기독신보 이사,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위원 등을 역임하며 대외적으로도 활동이 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 개복교회 안에 교육기관으로 영신여학교(永信女學校)와 영신유치원(永信幼稚圓)을 설립하여 교장과 원장을 역임했으며, 이 일로 군산 개복교회는 호남지방에서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닦였다고 하겠다. 교육기관의 융성은 인재양성의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일취월장 성장 발전하게 되자 군산 개복교회는 교계나 대외적으로 부흥발전하는 교회로 소문나자 당시 시무목사였던 김필수 목사가 제4회 총회장으로 피선, 교단을 위해 행정적인 봉사에 이어 1930년에는 제19회 총회장으로 홍종필 목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군산 개복교회 김필수 목사에 이어 한 교회에서 두 번째 총회장 배출
한 세기를 넘긴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의 총회장이 나온 대형교회들이 더러 있지만 반 세기도 되기 전에 조선교회에 한 교회에서 두 사람의 총회장을 배출하게 된 것은 교계의 화제 거리요 자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경성의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번째로 탄생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1936년 제30회 전북노회가 1935년 4월 29일 갑자기 서거한 홍종필 증경총회장이요, 증경노회장이었던 전임 노회장에 대한 약력을 소개하면서 그의 인품과 사람됨에 대해 노회록에 남긴 평가를 인용해 보면 “先生은 천성(天性)이 沈眞하시고 言少遠念하사 진리를 敬愛함으로 一般信者에 根本이시였다.”(전북노회 제30회 회록)고 했다.
1930년 9월 12일에서 18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 모인 총회는 목사회원 64명, 장로회원 64명(2명 불참), 선교사 회원 32명 합계 21개 노회에서 158명 출석으로 개회한 가운데 총회장 차재명(車載命) 목사의 사회 하에 1부 개회예배를 드린 후 임원 선거에 들어 갔다.
이때 당시 홍종필 목사는 겨우 43세의 젊은 나이로 관서지방의 높은 벽을 뚫고 제19회 총회의 총회장으로 피선된 것이다. 그의 나이 약관의 40대 초반 젊은 목사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총회가 진취적이었고 혁신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임원이 개선된 후 사회봉을 잡은 홍종필 목사는 회원들의 어려운 질문들을 지혜롭게 잘 받아 넘기는 수완을 나태내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회원이 젊은 총회장을 시험이라도 한번 해 보겠다는 듯 손을 들고 다분히 짓궂은 질문을 했다. 회장님 장로가 안수 및 목사처럼 축복기도를 못하는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시요 라고. 이에 대해 홍종필 총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회 헌법에 명시된 대로 목사는 사도들이 행한 특권을 전수하였기에 목사 외엔 장로가 안수나 축복기도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장로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당회장 될 수 있어”
홍종필 목사는 장로출신 목사였기에 이 질문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 간단명료 하면서도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종필 목사가 재직했던 제19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결의안들을 살펴보면, ① 당국에서 종교단체 법안을 제정해 종교단체를 감독할려는 일에 대하여 총회는 반대하기로 하다. ② 매년 3월 지키던 꽃주일(후에 어린이주일로 됨)을 폐지하고 그 날을 신학교주일로 하기로 변경하다. ③ 장로가 총회장은 될 수 있으나 당회장이 못되는 이유에 대하여 부득이한 경우에는 장로가 당회장이 될 수 있다고 결의하다. ④ 안수 및 축복기도는 장로가 할 수 없다. ⑤ 제주노회 설립을 허락하기로 결의하다. ⑥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해 종교교육(宗敎敎育)지를 창간하기로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병고로 인해 총회장직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 5월 29일 갑자기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일이었다. 당시 유족으로는 사모였던 김완윤(金完允)과 장남 창길(昌吉)외 1남6녀를 남기었다.(1940간 기독교연감 및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上 1928, 下 19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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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19회 총회장 홍종필(洪鍾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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