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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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그의 아내와 동침한 후 두 아들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이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다. 세월이 흘러 가인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왔고, 그의 동생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답변이 궁금하다.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가 아담에게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제사법에 어긋난 것이라서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벨은 그의 양의 첫 새끼로 피의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설득력이 빈약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가인이 바친 제물이나 아벨이 바친 제물이나 다같이 히브리어 “민하”를 쓰고 있다. “민하”라는 말은 “선물”(gift, present)라는 의미도 있지만 “제물”(offering) 혹은 “희생”(sacrifice)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따라서 가인이나 아벨이 바친 제물에 대하여 다같이 “민하”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친 제물에 대하여 특별히 구별하신 것 같지 않다. 굳이 제물을 두고 말한다면 가인이 바친 땅의 열매에 대하여는 “미프리 하아다마”라는 단수를 쓰고 있는 반면, 아벨이 바친 제물, 양의 첫새끼들에 대하여 “밉브코롯 초노"라고 복수, 그리고 기름에 대하여도 “우메헤르베헨”으로 복수형으로 씌여있다. 즉 ”그의 양의 첫 새끼들과 그 기름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 한 마리만 바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첫 새끼들과 그의 기름들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벨은 분명 하나님께 아낌없이 풍성한 예물을 바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 주셨다는 믿음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점에서 아벨의 제사를 가인의 제사보다 더 선호하셨을 것이다. 히브리서 11:4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점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지 않았겠나 생각된다(레 1:3; 22:20-22; 삼하 24:24 등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본문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 뿐만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아벨에 대하여도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이라는 사람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물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벨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이다. 히브리어 본문은 동사, “받으시다”(regard, looke with favor)라고 번역하는 “샤아”는 사람과 제물의 두 개의 목적어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데, 이 목적어들은 “브”라는 접속사로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5절의 문장을 살펴보면 가인, 가인의 제물, 부정사, 그리고 주어를 포함한 동사의 순서로 나열된 것을 보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은 제일 먼저 가인이고, 다음이 가인의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벨의 경우는 정상적인 순서로 동사, 주어(하나님), 목적어로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정상적인 순서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질이나 양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인이나 아벨이라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었는가? 그가 제물을 바치기 전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제물을 바친 후의 하나님께나 그의 아우 아벨에게 한 행둥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그는 매우 화를 내고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하는 히브리어는 화를 내거나 낙심되고, 좌절되었을 때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다(욥 29:24). 이와 반대는 민 6:26에서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백성들에게 은혜 베푸시고 평강을 주시라는 축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매우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는 자이다. 하나님께 반역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절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왜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을 유추해보면 가인은 이미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죄를 다스리라고 타이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한다. 한글 개역판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마소라 사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BHS는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를 첨가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에 따라 현대의 역본들은 BHS의 제안을 따라 번역하여 문맥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고, 그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함께 나가자는 제안을 하고 결국 그를 쳐주였다는 것이다. 가인이 아주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살인을 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본성이 악한 죄인이다. 이러한 사람이 아무리 양질의 다량의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예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됨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자식들은 형제 사이에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것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예배 의식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형제 간에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이진 것이다. 앞으로 아담의 후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무섭고 비참한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폭력과 살인을 금하는 한계선은 무너져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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