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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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58장 6절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일부의 설교자나 성경 선생들은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한국처럼 금식 기도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 금식을 기뻐하시는 것일까? 본문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주 일상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 금식을 함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건의 방법으로 금식을 한 것이다. 히브리어 “촘” 혹은 “춤”이라는 말은 사람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람이 금식할 때는 보통 삼베 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얹고, 울거나 애곡을 한다(더 4:16).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했다.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을 압제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하려는 위선적인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일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금식을 책망하신다.
“보아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친다.
오늘날 너희가 하는 금식은
너희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하는 (개역: 기뻐하는) 그런 금식이냐?
사람이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냐?
사람이 갈대처럼 자기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를 펴고 재를 뿌리는 것을
네게 금식이라 부르겠으며,
여호와가 가뻐 받을 만한 날이라 하겠느냐?“ (사 58:4-5)
금식을 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앉아 있으면서 다투고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위는 위선이며, 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금식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보다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사회에서 압제 당하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체, 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식보다 사회 정의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문맥의 전후를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금식을 장려하거나 금식을 격려하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성경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개역 성경 오역의 한 구절이 한국 성도들의 신학과 신앙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 성경 번역자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경건 생활은 압제 받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금식한답시고 금식 기도원에서 즐비하게 누워서 금식 날자 계산하며 누가 더 오래 금식하고 있는지 그의 인내심과 체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금식을 통한 경건 생활과 치유를 강조하고, 또한 성도들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 구절을 암송하고, 입에 오르다 보니 금식은 어느 덧 한국의 경건한 성도들에게 일상의 생활로 정착해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분명 오역이며, 잘 못된 해석이다. 적어도 본문에서 하나님은 금식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그의 복음 사역 중에 금식을 하시지 않으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의 비난을 받으셨다(막 2:18-22). 성경에서는 금식을 근본적으로 금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건강상 할 수도 있고 또한 경건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경건은 은밀한 가운데 그의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는 금식을 하되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라”(마 6:18)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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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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