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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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광주 태생
김재석(金在錫·1900~1959.10.6)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1900년 초에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부 소속 배유지(Rev. Eugene, Bell, 裵柚祉)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성실하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고 교회에 잘 다니는 그를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광주지역 선교부 책임을 지고 있던 배유지 선교사가 그가 설립한 숭일학교 초등학과에 입학시켜 졸업케 하였다. 이어 고등과에 진학 3년간 열심히 학업을 닦고 졸업하였다.
김재석은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 등을 통해 배운 유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새로운 근대지식을 맛보게 되었다. 그는 당시 숭일학교(崇日學校) 교장이었던 타마자(Rev. John Van. N. Talmage      打馬字) 선교사의 인격적 신앙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후일 목사가 될 마음을 가졌다.
숭일학교 재학시 학교 경건회 시간마다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자유가 없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기독교인들이 할 일이라고 늘 가르쳤다. 이 때 완고했던 고집과 유교 사고방식에 꽉 사로잡혀 있던 그도 나도 선교사들처럼 일본 식민지 아래서 억압받으며 소망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조선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수십번 마음 속으로 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안수
이렇게 목회에 뜻을 두고 기도하던 중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30년 3월 제25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 동기들로는 나지환, 백남주, 이원영, 공성택, 이창호, 오윤호, 주남고 등 23명이 함께 졸업했는데, 그 중엔 제39회 총회장 이원영 목사도 있었다(한국기독교회사 총람, 이찬영 편, 소망사 1994. 서울 p.948).
김재석은 졸업하자 마자 고향이 가까운 전남 광산군 송정읍교회의 청빙으로 전도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그해 9월 전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1931년 봄 3월 정기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도사로 시무하던 교회의 정식 청빙을 받고 송정읍교회 위임목사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교역(敎役)에 힘을 쏟았다.

신천읍 온천교회 부임
그가 목회를 잘 한다는 소문이 황해도 신천읍까지 알려져 1935년 김재석 목사는 신천읍에 있는 온천교회(溫泉敎會)의 청빙을 받고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로 목회지를 옮겼다. 이 교회는 1914년 3월 3일 설립된 신천읍 송도리에 있는 교회로, 당시로써는 자립교회로 성장한 교회였다(예수교장로회연감 1940년간, 예장총회 발행, 황해노회 교회현황 참고).
그는 이 교회에서 4년간 목회를 하다가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같은 신천읍 내에 있는 동부교회(東部敎會)로 임지를 옮겨 시무하게 된다. 이 교회는 신천읍 사직리에 설립된(1933.2.18) 교회로 온천교회 보다는 조금 늦게 세워진 교회이나 교세는 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을 맞이 했으나 한국사회는 준비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라 사회질서가 혼란에 혼란을 더해갔다. 북한지역에는 소련군이, 남한지역에는 미군이 각각 질서회복이란 명목으로 진주했으나 3년간의 해방공간의 무질서 속에 얼마 가지 않아 민족상잔의 상징인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남북 공히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였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의 힘을 빌려 공산당들이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미군들의 앞잡이로 몰며 공산당에 협력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특별히 조선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徒聯盟)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은 보통 고통을 받는게 아니었다.

공산당 탄압 피해 월남
김재석 목사에게도 공산주의자들의 마수가 미쳤다. 몇 차례나 협력을 요청받았으나 신앙양심상 하나님을 배격하는 공산주의 무신자들에게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렵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와 교인들을 뒤로하고 1947년 10월 가족들을 이끌고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감시가 심해 몇 차례나 실패하였다. 얼마 후 인민군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고 전문 안내인에게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간신히 3·8선을 넘고 난 후 김목사는 두고온 신천읍 동부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하며 북쪽을 향하여 사죄의 기도를 올리며 안타까워하였다.  얼마동안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워했고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김재석 목사는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 서부교회(西部敎會)에 목회자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목사의 소개로 1948년 월남하던 이듬 해에 광주에 있는 서부교회에 부임하였다. 광주서부교회는 고향 출신 목사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전 교회가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 주었다. 김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교인들을 돌보며 제대로 된 목회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였다.
이렇게 피난 나온 목사가 성공적으로 목회가 자리잡아 나가자 노회 안에 자연히 목회 잘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전남노회가 개회되었을 때 자신이 예상도 않았던 전남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광주제일교회 시무 중 6·25 맞아
그는 노회장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광주제일교회(光州第一敎會)의 청빙을 받아 교회를 옮겨 목회하던 중 통한의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들은 삽시간에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와 7월 22일에는 전남 광주까지 점령했다.
김재석 목사는 이미 북한에서 공산당을 겪었기에 광주에서도 정상적인 신앙생활과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가족들과 교인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조국과 교회의 운명을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다 북한에 두고온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죄스럽기 그지 없었다.
전쟁이 유엔(UN)군이 참전해 반전의 기회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상황이 호전되자 김목사는 광주제일교회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온 김재석목사는 전남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교회당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구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7회 총회에서 피선
그의 지도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지 1952년 4월 29일에서 5월 2일까지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혼란과 혼돈의 와중에서 그를 지도자로 뽑아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고 부숴버린 교회를 재건하고 정비하는데 최전선에 세워 한국교회를 재정비하는 일에 쓰시었다.
그가 재직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 의결사항들을 잠시 살펴보면, ①목사가 관공리나 국회의원으로 전직하게 되면 안수(按手) 목적에 위배됨으로 마땅히 성직(聖職)인 목사직을 사직해야 한다. ② 노회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평양, 평북, 안주, 평동, 용천, 황해, 황동, 평서, 함남, 함북으로) ③ 목사자격 시취의 건에 대하여서는 비상사태로 선언하다.
김재석 목사는 탁월한 언변과 행정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구비해서인지 총회장으로써만 아니라, 총회 정치부장으로 섬긴바 있고, 여러 기독교협의체의 의장직과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으며, 총회장이 되던 해에는 교단직영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이사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광주숭일중고등학교장에 취임 봉사하기도 했고, 1957년 4월에 총회산하 지방인재 양성기관으로 세운 광주신학교(光州神學校) 교장에 취임, 지방교회 인재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959년 10월 16일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그리고 그리던 주님의 품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민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한영제편 1981, 기독교문사, 서울 초판 p.2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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