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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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순천 태생
정인과(鄭仁果 1888.1.9.~1972) 목사는 평안북도 순천(順天)에서 1888년 1월 9일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정의종(鄭鍾)이었으나 후에 인과(仁果)로 개명하였다. 영문(英文) 이름은 제임스 정(James Chung)이다. 그는 일찌기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40년 5월 고향에서 야소교 소학교와 1907년 6월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에 입학 1911년 5월에 졸업하였다.
그의 재능을 보고 인정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Seminary)에 유학 3년간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다시 뉴욕대학(Newyork Unirersity)에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8월까지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훌륭한 신식교육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미국에 체재하고 있을 때 1913년 10월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흥사단에 입단해 흥사단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19년 4월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에서 안창호(安昌浩)를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특파원으로 파송할 때, 황진남과 함께 안창호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통합 개편될 때 외무부(外務部) 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1920년 10월 외무부 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과 정치사회학을 공부한 뒤,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말경 귀국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초판 p.475 참조).
정인과 목사는 1933년 총회 안에 상설부서인 농촌부(農村部)와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아 취임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가장 핵심적인 부서였고 종교교육부의 총무는 막대한 재정(財政)을 운영하는 요직이었기 때문이다. 총회산하의 각종 교재(敎材)와 찬송가 등이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인쇄 제작 판매되는 관계로 요직 중 요직이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교육부 총무자리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초대 종교교육부 총무
1935년 9월 6일부터 13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81명, 장로 81명(미참 4명), 선교사 4명의 회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가 모였다.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한 후 회순에 따라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성로 목사를 따돌리고 정인과 목사가 제24회 신임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정인과 목사는 경기노회 총대가 되어 총회원으로는 처음 참석하였는데 부총회장 김석로 목사를 따돌리고 총회장에 피선되는 이변을 일으켰으니 한동안 총회장 내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초임 총대가 총회장이 되었으니 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의 위세가 어떠했던가를 말해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총회100년 역사상 정인과 목사시대 당시 이외는 지금까지 없었던 유일의 사건이 되었다.
부회장은 김성로 목사가 재선되었으나 그는 총회장은 끝내 못하고 물러났다. 갑자기 총회장이 된 정인과 목사를 미국 북장로교 소속 허대전(Rev. J.Godden, Holdcroft, 許大殿) 선교사가 옆에서 많이 도왔다. 허대전 선교사는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주일학교 교육사업에 투신 경험도 있었고,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직 시에도 일익을 담당한 바 있었고(1911. 4), 1932년까지 상임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부총무였던 정인과 목사를 훈련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판찬송가·희년 설교집 발행
그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 사항 중 행정적인 것은 의산(義山)노회를 의산노회와 봉천노회로 분립키로 한 것 외에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총회 종교교육부편으로 출판한 신편찬송가(총400편)를 발행한 일이다. 이 찬송가가 한국교회 오늘의 통일찬송가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큰 사업은 이미 희년(총회설립)은 지났지만 총회 이름으로 희년기념 ‘목사설교집’을 발행한 일이다.
이후 정인과 목사는 1936년도부터 총회의 총대로는 출석하지 않았고, 이듬해 1937년에는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직도 사임하였다.
이후의 정인과의 후반기 활동은 친일(親日)로 일관하였으니 그의 인격과 신앙을 탓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인 시작에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전환되고 만다(총회를 섬긴 사람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p.106).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1937.6) 일경에 체포되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사업보고를 통해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戰勝), 무운장구기도, 전사병위문금, 국방헌금, 전상자와 유족위문 등 사적으로, 공동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도 표시되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할 때 애국운동에 주야로 애쓰신 지맹장 기타 간부 제씨와 활동하신 애국반 제위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 더욱 힘써 흥아사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결심하고 전보다 더 활동합시다”라는 장로교측의 부일협력 상황을 보고했다.
정인과는 같은 해 12월에 이 단체의 총 간사를 맡았고 이듬해 1월엔 감리교의 정춘수 목사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선임되어 노골적인 천일의 사역을 해나갔다.
1941년 8월엔 장로회 중앙상치위원회에서 전시체제실천 성명서를 발표하는데도 참여하였고, 이어서 조선장로교신도 애국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과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달 삼천리사(三千里社)가 주최하는 임전대책협의회에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1941년 9월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 3일부터 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매일신보」에 종교계의 임전체제라는 시평(時評)에 “일본적 기독교로써 익찬일로(翼贊一路)의 신출발”을 기고해 기독교계의 부일협력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일제의 전쟁물자 동원에 기독교 이용
이 글 결론부에서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 사이에 거교단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써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 철저화의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노력 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하여마지 아니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연맹 총간사로서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헌종(獻鍾)보고서 독촉의 건 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교회의 종을 떼어 전쟁물자로 바치고 보고하도록 독촉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19일 장로회 총회장 최지화 및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2대 기금으로 장로회에서 모금한 2만3221원28전을 냈다. 이 돈으로 자동차 3대를 제작해 같은해 11월 조선신궁에서 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로 헌납식 행사를 가졌다.

조선기독교의 일본화에 앞장
1942년 9월엔 일본그리스도교단 통리 도미타(富田滿)가 만주국 10주년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가다가 경성에 들렀을 때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마련한 조선기독교의 일본화급무라는 주제의 간담회에 장로교를 대표해 최지화와 함께 참석했다.
같은해 11월 조선군애국부를 방문해 지난 1년 동안 일본군이 전승을 거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밤 50석을 내면서 대동아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내의 신도 30만, 더욱이 부녀자들은 지극히 적은 돈을 각출하여 조선의 특산물인 평양율(平壤栗)을 조금이라도 더많이 병사들에게 맛보여 드리겠다는 생각으로 감격한 신도들이 승율(勝栗)을 모아 헌납하는 것이라고 유난을 떨었다.
1943년 2월에 국민 총력연맹 주최의 미영격멸간담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해 연맹 간부들과 함께 미·영폐풍의 교정에 합의하기도 했다.
해방후 1945년 10월엔 백낙준 김찰관 등과 함께 조선호텔에서 이승만을 면담했고, 11월엔 임시정부영수전국환영회 재무부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3.1동지회 중앙본부의 평남대표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조선신탁 통치 절대반대 임시정부 절대지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47년 4월 신진당(新進黨) 간부를 개선할 때 김봉준 김호와 함께 3인의 부위원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6월 독립협회확대준비회라는 임의단체를 결성, 회장을 맡고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렸으나 서재필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9년 2월 21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건강 때문에 보석으로 나왔다(친일인명사전 같은책 1960년경부터 1963년까지 3년간 경기도 문산법원리 장로교회를 담임하였다. 친일 인명사전에는 1971년 행방불명 p.497 참조)으로 기록되었으나, 김수진 목사가 쓴 총회를 섬긴 사람들 이란 책에서는 1972년 경기도 파주자택에서 영민하였다고 기록하였다(총회들 섬긴사람들. 김수진 저 p.1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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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24회 총회장 정인과(鄭仁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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