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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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합천 출신
이문주(李文主, 1884.1.23~1945.6.16) 목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陜川)에서 1884년 1월 23일 태어났다. 이곳은 비록 산골이지만 이미 부산에 본부를 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그 힘든 오지 중에 오지 합천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마침 구식 교육기관이었던 한문사숙(漢文私熟)을 막 졸업하고 집에 놀고있던 이문주는 왕길지(Rew. G. Engel, 王吉志)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기독교에 입신하여 곧바로 합천교회(陜川敎會 1907. 9. 설립)에 출석하였다.
당시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회에서 1개월씩 소위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를 개설 운영하였다. 이문주는 이 과정을 매년  한번도 걸르지 않고 열심히 참석해 성경을 배우며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익혀 가며 자기의 신앙화 작업을 쌓아갔다. 그의 이러한 열심을 눈여겨 본 선교사들은 그를 선교사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임명하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후 호주장로교선교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신학(神學)을 공부하게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
청년 문주(文主)는 그곳에서 신학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1918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제11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가 처음 부임한 곳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0여키로 떨어진 칠곡군 신동교회(新洞敎會)의 청빙을 받아 첫 목회지가 되었다. 후에 달성군 점산교회(오늘의 대구 북구 침산교회?)와 상주군 상주읍교회(尙州邑敎會)를 거쳐, 1924년 3월 대구읍교회에서 분립된 대구남산교회(大邱南山敎會 1915.9. 설립)에 부임하여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6월까지 시무하였다.
그는 1936년 9월 10일에서 19일까지 광주양림교회에서 모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장 이승진 목사를 도와 교회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에서 16일까지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회원으로는 목사 82명, 장로 82명(미참 3명) 선교사 35명으로 모두 196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직전 총회장 이승길 목사가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17절을 중심 본문을 삼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성찬식을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총회장에 이문주 목사, 부회장에 홍택기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 중 헌의부에 이상한 안건이 하나 접수되었다. 내용인즉 임지없이 있던 무임목사가 장로로 피택될 수 있는가? 라는 질의성 안건이 올라 온 것이다. 이 안건은 각 노회에 수의한 결과 부결 처리되었다. 또 한 가지 큰 안건이 하나가 올라왔는데, 총회상설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폐지안이었다. 당시 이 부서의 상임총무는 배민수(裵敏洙) 목사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폐지
배민수 목사는 교육부 총무인 정인과(鄭仁果) 목사와 함께 흥사단 계열 인사로서 미국 유학파였다. 이때 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상임총무였던 배민수 목사의 사임에 이어 총회의 중요 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가 폐지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농촌부가 폐지된 이유가 겉으로 표면화 된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매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이 점점 대폭 삭감되고 있었고, 둘째는 농촌부 총무가 농한기에 개최되는 달(月)성경학교(聖經學校)에 가서 수강생들을 의식화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그동안 배민수 목사의 활동으로 농촌교회가 3배나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일제를 돕는 일부 총회대의원들은 총회에서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농촌부를 폐지하기로 헌의(獻議)하여 투표한 결과 가표가 78표, 부표가 32표로 농촌부가 폐지되고 만 것이었다.
농촌부가 폐지된 후 배민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삼애운동(三愛運動 ; ① 하나님을 사랑하고 ② 땅을 사랑하고 ③ 생명(사람)을 사랑한다)을 제창하면서 개인적으로 농촌지도자들을 훈련해 배출하는 일을 전개하였다.
이문주 목사의 교정(敎政) 후반기에 이르러는 정체의 변동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일제당국에 본의아닌 협력의 길에 들어서는 불가항력적인 일도 겹쳐지고 있다.
이문주 목사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수장이 되던 해에 일제당국의 종교정책 및 식민지 정책에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던 것이다.

중·일 전쟁으로 친일화 강요
1937년 7월 7일을 기해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하면서 아세아는 아세아인이 대동 단결하여 서양의 모든 세력을 몰아내자고 하면서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조선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한달 간격으로 창간 작업을 허락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기독교 계통(Mission School)의 교육기관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다. 그 결과 기독교 계통 미션스쿨들은 자진 폐교가 아니면 강제 폐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 당국은 전국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강제 해산 시킬려고 하다가 1년간 유예하였다. 왜냐하면 신사참배가 결의될 것을 알았던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자진해산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와함께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조선말을 가르치는 일을 금지시켰다. 이러다보니 교회 안에까지 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문주 목사는 총회장에 취임한 그 해 1937년 3월 재단법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유지재단 이사에 취임했고, 1939년 9월 신의주 제2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朝鮮耶蘇敎長老會聯盟)을 조직할 때 평의원(平議員)으로 참여했으며, 그 해 12월엔 대구성경학원(大邱聖經學院)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경북노회지맹(慶北老會支盟)을 결성 할 때도 이사로 참여했다.

기독교 친일인사로 전락
1942년 5월엔 기독교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2일 장로회총회 상치위원(常置委員)으로써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주최 황군환자용자동차 3대 헌납식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4월엔 경북노회 상무위원(慶北老會 常務委員)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 24일 일본기독교(日本基督敎)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장(慶北敎區長)의 감투까지 본의 아니게 덮어쓰고 만다.
또 그는 해방이 되던 해 1945년 2월 경상북도 도청회의실에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 회의(朝鮮戰時宗敎報國會議) 경상북도 지부이사를 맡아 일제의 앞제비 노릇까지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857참조).
이는 그 시대를 지고 살았던 자들이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수치스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이문주 목사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무리이겠지만,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이끌어가는 교회의 지도자로써의 뒷모습이 씁쓸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회기의 중요 결의안 들을 살펴보면, ① 농어촌교회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연중 농사철 행사표를 제작 보급하기로 하다. ② 방지일 목사를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서양 선교사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중국 산동에 총회파송 선교사로 임명하다. ③ 최혁주 목사를 만주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가결하다. ④ 조선말로 기도와 설교 금지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왔었음을 공표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문주 목사의 작고 일시에 관하여 총회를 섬기는 일꾼들(2005 장로교출판사 p.117)을 쓴 교회사가 김수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총회장을 맡았던 이문주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몇 개월 앞둔 6월에 한국교회를 떠났다”라고 기록해 행방불명이 된 것인지, 이후의 사망일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제2권 p.857)에서는 분명하게 1945년 6월 16일 사망한 일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첨언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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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李文主)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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