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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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로마서 집필을 마치고, 그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내려던 때일 것이다.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패망한 이후에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율법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된 시기에 일이다. 유대 랍비가 문제가 된 멀리 떨어진 유대인 공동체에 율법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면, 그 전달자가 랍비의 서신을 갖고서 그 지역의 공동체에 가면, 그를 보낸 랍비의 권위를 그대로 갖는다. 거기서 그 공동체에 랍비의 서신을 낭독하고, 랍비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여서, 전달 목적이 이뤄지면, 그 율법 전달자의 권위와 사명이 그 것으로 끝나도록 한 것이었다. 간혹 전달자에 따라서 랍비적 권위를 항구적으로 갖는 이들도 있긴 하였다. 이는 복음서에서 멀리 있는 임금이 그의 사신들을 농장에 보내었던 형식과 일치함을(막 12:1-12) 보아서 그 시대의 전달자의 역할과 기능은 오늘 우리의 특별대사와 같은 성격을 띤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의 로마서 서신을 겐그레아의 여집사 뵈뵈에게 맡겨서 로마에 전달하도록 하였는데, 상식적으로 당시 정황을 보아서 로마서 서신을 낭독하고 가르치고 바르게 전달하는 사명을 가졌음을 인식할 수 있다. 바울이 서원이 있어서 머리와 수염을 밀고 특별한 기간을 보낼 적에도, 그가 뵈뵈의 교회에서 지낸 것을 보면, 뵈뵈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제자와 스승의 관계임을 예측할 수 있다. 베드로 서신에서(벧후 3:15-16) 바울의 가르침을 사사로이 다룰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인식한 것을 보아도, 바울이 안심하고 자신의 복음을 전달할 자를 여 집사로 선별하였다는 것은, 뵈뵈가 얼마나 삶과 믿음과 가르침에서 바울의 신뢰를 얻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더욱 로마서가 다룬 바울의 복음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와의 갈등도 다룰 뿐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인 부문도 거론하고 있어서, 신앙과 실천에서 여간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지혜로움이라든지 도덕적인 실천면에서 권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도록 청중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내려면, 복음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자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하였을 것이다. 로마에 바울의 복음을 전달한 뵈뵈는 단순하게 복음서를 전달한 짐꾼이 아니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사사 드보라가 등장하였을 시기에,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를 통솔하는 바락도 나서기를 꺼려하는 전쟁에서, 여인으로서 군대사령관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여성 드보라의 지혜, 담력, 카리스마가 남성으로 형성된 군대를 이끌기에 압도적인 권위와 능력을 갖추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남성들이 대표권을 갖고 우선권을 갔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복음서 사도행전에서 여 제자 다비다가 이미 그 사회에 상주하였고, 빌립집사의 딸들이 여선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었던 것을 보면, 오늘 우리시대의 워킹 맘들이 유리 천장을 뚫고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나 회장으로서 경영자의 위치에 있는 것에 낯설지 않은 것과 같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사도들 가운데서도 실력과 활동이 출중한 여사도 유니아를 언급하였는데, 그녀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옥고를 치룬 사도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의 장막에서 복음전도를 펼쳐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영향을 주고,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내신 분들 중에 여성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서도, 오늘 우리 교회가 전통적인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로마로 보내는 복음을 기록한 바울은 옥에 갇히고, 그 복음을 로마에 전달한 사도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음을 주목해 보자. 바울 주변에는 바울의 신뢰와 바울이 가르친 교훈에 탄탄하게 무장된 동역 자들이 수많이 있었다. 화가 렘브란트에게 있어서 ‘탕자의 귀향’이 그의 삶과 영혼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작이라면, ‘로마서’는 그가 그의 생애 중에 목숨을 내걸고 전한 복음을 정리한 최고의 유작이라 할 수 밖에 다른 말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섬세하고 온 힘을 다하여 기록한 유작을 뵈뵈에게 맡겼다는 것을 보면, 그 무언가 남성들이 잃어버리는 것들을 여성들이 만회할 수 있었음이 아닐까? 뵈뵈는 특히 우리 남성들이 중독된 권력, 명예, 돈 같은 것에서 자유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대표권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지만, 저들의 책임과 형편이 지난날 세월호가 전복된 이후, 밤새 야반도주하다가 매화 밭에 쓰러져 백골이 되었던, 그 아무개 교주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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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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