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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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께서 그에게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힐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애게 자신이 금식을 하지 않는 아유를 세가지 비유를 들어 답변하시는 내용이다. 첫째는 결혼잔치에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고, 세번째는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여 주셨다. 이 세 비유의 핵심은 각각 그 비유의 쌍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함께 붙이거나 같이 사용할 때는 둘 다 버리거나 쓸모 없이 된다는 점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예수님 자신의 경건 생활은 같이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변증하시는 말씀이다. 금식은 우리 육신에 속한 인간들이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나누고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가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시는데 있어서 세 가지 유사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우리가 이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비유들 간의 유사성을 찾아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각각의 비유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강조점이나 독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결혼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한 신랑이 아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요,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내심으로 사실상 신랑 노릇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신랑이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를 내는 것이 오랜 풍습이고, 심지어 하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법전에서는 결혼식에서 신랑이 잔치를 베풀지 않으면 그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가나 혼인잔치에 소개되는 예수님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요, 포도주를 내신 보이지 않는 숨은 신랑이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내신 후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식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예식이었다(렘 31:31-34).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선포한 사건이 바로 가나 혼인잔치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혼인잔치가 열린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 신랑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임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경건생활은 마치 신랑과 신부가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먹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에서 헌 옷에 새 베 조각을 붙이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새 베옷 조각에, 그리고 유대인들의 금식을 헌 옷에 비유하신다. 만일에 생베 조각을 헛 옷에 붙일 경우 둘 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그래서 옷이 낡으면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옷에는 교복, 군복, 운동복, 그룹의 단복 등 여러 종류의 옷이 있는데, 사람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소속과 위치를 알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더불어 아담의 가죽 옷을 입고 아담과의 연대성 가운데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아담이 입었던 낡은 가죽 옷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가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갈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낡은 옷에 생베를 붙이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아예 낡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려고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새 옷을 입은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롤 옷 입고 사는 사람이다. 결코 헌 누더기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헌 옷에 새 베 조각을 붙이거나 새 옷에 헌 배 조각을 여기 저기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과는 구별된 존재들이다.
셋째 비유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포도주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은 새포도주이고, 유대인들의 금식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아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포도주의 화학작용이 오래된 포도주 보다 활발하고 신축성이나 팽창력이 강하여 그것을 담는 그릇이 신축성이 없으면 터질 수 밖에 없고, 결국은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버리기 때문이다. 금식은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자하는 경건을 위한 한 방법으 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경건생활이 금식하는 유대인들의 경건생활과는 맞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라고 가르치셨다(요한 6:55-56).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야 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정한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지속하기 위한 경건은 금식이 아니라 도리어 먹는 것이다. 여기서 살과 피는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말씀을 먹고 마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경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경건, 말하자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다면 금식 대신에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말씀을 먹고 말씀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금식하는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하며 나누는 거룩하고 인격적인 사귐의 삶이 더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아담의 가죽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생베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잔치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경건 생활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말씀을 먹고 마시며, 말씀대로 사는 삶이 생명을 주는 진정한 경건 생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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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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