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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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용천 출신
장규명(張奎明 1891. 11. 14~1950)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용천은 의주(義州)와 철산(鐵山)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선교사들이 주재했다.
철산과 의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의 조사(助師)가 이곳에 드나들면서 복음을 증거할 때, 장규명은 위대모(Rev.  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의 어느 조사로부터 쪽복음서를 받고 완고했던 유교 집안에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장규명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모 목사(1870. 6. 7~1952. 5. 15)는 뉴욕주 부르클린 출신으로 1886년 뉴욕에 있는 파크(Park College)대학을 마치고, 1888년 그린위치 대학과 1892년 예일(Yale)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895년 유명한 유니언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어서 1895~1896년 사이에는 다시 예일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896년 10월 2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으로 파송받아 평양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친 우수한 인재였다.
위대모 선교사는 1897년 평북지역 선천선교부 개설 책임을 맡았고, 동시에 선천지방 순회선교사로 활동하며 선천읍교회와 선천남교회를 개척하였다.
또 1901년에 이르러서는 선천지역에 본격적인 개척선교에 헌신하였으며, 1902년엔 의주지역 선교지를 책임지기까지 하였다. 1906년 선천에 신성학교(信聖學校)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였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서울 p.507~508 참조).

용천지방엔 많은 교회 설립돼
정규명은 기독교로 개종 후 조사들의 안내를 받아 1898년에 설립된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유년주일학교를 다녔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성례전(Sacraments)을 베풀자 교회가 하나 둘씩 설립되면서 용천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1940년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연감 자료에 의하면 58개 교회가 기록되고 있다.
제18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경성의 새문안교회를 시무한 바 있는 차재명(車載命) 목사도 용천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용천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일찌기 개화문화와 신문물을 받아들인 신흥지역이었다.

교회 안에 신식 교육기관인 초등교육기관 병설
용천지역에 교회가 점차 늘어나자 가까이에 있던 위대모 선교사가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초기의 조선교회가 대부분 그랬지만 이곳 용천지역에도 개척교회가 시작되면 교회 내에 자연히 부속기관으로 초등교육기관이 병설되었고, 이 기관을 통해 기독교교육이 실시되었다.
당시의 선교부 정책 가운데 하나가 교회 안에 설립 운영되는 초등교육기관 운영비가 별도로 지원되었던 것이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 세워진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통해 불신가정에서 출생한 자녀들이 배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자연히 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로 학생들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지사였던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장규명 소년 역시 용천군 양하면 시남동에 세워진 양시교회(楊市敎會) 유년주일학교(幼年主日學校)에 다니면서 성경도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보성학교(普成學校)에서 보통과 3년, 고등과 3년 과정을 공부할 때 성경과목만은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선천북교회 조사로 사역
그후 장규명 청년은 모교인 보성학교 송자현 교장의 권유로 얼마동안 위대모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고, 그 후엔 1912년 3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역자로써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고, 위대모 선교사의 배려로 처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의 조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사활동을 하게 됨으로 학비문제가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으며, 또 평양과는 거리도 그리 멀지않아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신학교에서 선천북교회로 가곤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주일이면 예배를 인도했고, 토요일이면 교인심방을 열심히 하였다.
한편 그의 주일설교 준비는 항상 방과후 신학교 기숙사에서 원고를 완성했고, 원고는 책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주일 오전 11시와 주일 저녁 찬양예배는 설교원고 노트를 꺼내들고서는 열심히 그리고 쉽게 말씀을 전파했다. 그는 주일이 지나면 월요일엔 또 평양을 가야 했다. 드디어 1923년 12월 19일 이승길, 김충한, 이학봉, 김치근 등 31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장로회신학교 제17회 졸업생이 되었다.
선천북교회에서 그의 설교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영력(靈力)의 힘에 이끌림을 받았던 교인들이, 졸업하던 해에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용천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시무하였다. 이미 급성장한 교회로 잘 알려진 관계로 선천북교회는 양전백(梁田伯) 목사가 부임해 있었기에 장규명 목사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함께 목회를 하였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1년 유학
이때 교회의 배려로 장규명 목사는 미국 남장로선교부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일본 고배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1년간 연구생활을 하게 되어 유학했다.
또한 당시 미국 조직신학계의 거장으로 있다가 신학교 교장으로 와 있는 홀튼(Holton) 박사의 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리며 신학의 세계동향도 파악하게 되었고 목회의 활력소도 얻게 되어 당시로선 좋은 대접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귀국 후 다시 선천북교회 동사목사로 사역하다가 당시 담임목사였던 양전백 목사의 배려와 협력으로 1930년 같은 용천군 용천면 운흥동에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개척당시 선천북교회의 교인 일부를 양전백 목사가 떼내 보내줘 큰 어려움이 없이 개척목회를 성공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선천중앙교회도 모교회인 선천북교회와 대등한 규모로 성장하고 자립해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소식은 장규명 목사가 앞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위한 지도자로 발돋음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개인에게도 큰 보람이 되었다.

제20회 총회장에  선출,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파송
1931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금강산 온정리에 신축된 총회수양관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0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 홍종필(洪鐘弼) 총회장은 성경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으로 산상성회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이어 회순에 따라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장규명 목사가 제2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이 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제20회 총회 결의안건들을 살펴보면, ①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김순호 양을 파송하기로 하다. ② 총회 발전을 위해 3년 진흥계획을 수립하기로 하다. ③ 조선청년면려회를 만국연합회에 가입하기로 결의하다. ④ 남만노회 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남만·북만 노회로) ⑤ 전남노회와 평양노회 재단법인 설립을 허락하다.
장규명(張奎明) 목사는 청년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에 자신이 시무하고 있던 선천북교회에서 선천YMCA를 창설하여 조선의 미래가 청년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공산당에 체포된 후 행방불명
1945년 8.15광복을 맞이 했을 때 북쪽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그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과 한독당(韓獨黨)과 연락하였다는 허위 죄목으로 공산당(共産黨)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그의 가족상황 역시 파악할 길이 묘연하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수 많은 교계 인사들과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교계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서울 p.524~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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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20회 총회장 장규명(張奎明)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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