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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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장 엘리와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비리가 극에 다달아 이들을 방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미 무명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대로 제사장 엘리 가문을 숙청하기 시작하셨다. 블레셋과 전쟁을 붙여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싸워주시기를 바라고 언약궤를 메고 전장에 나갔다. 이때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패로 끝나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고, 여호와의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이 소식을 들은 제사장 엘리는 놀라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의 며느리 는 해산하던 중 여호와의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낳은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 죽었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문자대로 “영광이 없다”는 뜻인데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로 그렇게 붙였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천상에서 신들이 싸우기 때문에, 지상에서 그 신을 섬기는 백성들도 싸운다.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는 신상을 앞세우고 나갔다. 이스라엘에는 신상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를 메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여호와가 패배한 것이다. 여호와가 블레셋 사람들의 신, 다곤에게 패배하여 그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여호와의 궤는 다곤 신당으로 옮겨져 다곤 앞에 놓여졌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신, 다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심판을 시작하셨다. 다곤이 엎드려지고, 결국은 다곤 신상의 목과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아스돗으로부터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가드, 에그론 등의 성읍에 악성 종기가 퍼져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의 궤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고 말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앙의 원인을 나름대로 추측하고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금으로 각종 종기와 쥐의 형상을 만들어 속전으로 준비하고, 새로운 수레를 만들어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직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송아지가 딸린 암소 두 마리가 그것을 끌도록 하여 벧세메스로 보냈다. 물론 이 때에 송아지들은 어미로부터 떼어 놓았다.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만일에 이 암소들이 벳세메스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자기들에게 내린 모든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린 것이라고 믿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 내린 재앙은 우연한 것으로 돌리기로 했다. 젖 먹는 송아지가 딸린 어미 소가 아직 한 번도 메어보지 못한 멍에를 매고 순순히 길을 따라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도박임에 틀림없다.
결과는 뜻밖에도 이 암소들은 “벳세메스로 향하여 똑바로 갔으니 큰 길을 따라 갔으며, 울음소리를 내면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않았고, 블레셋의 군주들은 벳세베스 경계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삼상 6:12). 그리고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이 그것을 보고 그 날 에그론으로 돌아갔다.”(삼상 6:16).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임한 모든 재앙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자기에게 임한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한편 벳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돌아오자 이를 맞아 기뻐하였고, 사람들은 이 소들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한 후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하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의 아들 이름을 “이갓봇”이라고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블레셋 진영에서 그들의 신, 다곤과 싸우시고, 블레셋 백성들과 싸워 승리하시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는 개선장군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짐승의 발걸음마저 제어하시어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일임을 스스로 증거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여호와, 말 못하는 짐승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더 나아가서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시고 언약궤를 엘리의 집에서 궁극저으로 다윗 성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의 떠돌이 설교자들은 “벳세메스 암소”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설교하며 암소들을 언약궤를 멘 제사장에 비유하며, 우리 제사장들은 이 암소들처럼 좌로나 우로 치지 말고, 심지어 자식들이 울어대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한다. 이런 식의 설교는 얼핏 수긍이 가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지만 이것이 영해(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다. 영해란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숨은 뜻(hidden meaing)이나 깊은 뜻(deeper meaning)을 찾는 것이다. 오리겐이후 중세시대까지 이러한 성경 해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는 이러한 영해를 마귀의 장난이라고 정죄했다. 성경 해석은 기본적으로 성경저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찾고, 그것을 설교해야 한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설교해야지 벳세메스의 암소를 설교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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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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