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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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세기 몽골과 중앙아시아 전역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초원의 가장 유력한 종족인 케레이트족과 나이만족은 부족 전체가 기독교를 믿었고, 웅구트족과 메르키트족에도 기독교인이 많았다. 초원을 통일한 징기스칸은 4명의 아들 중 셋째 오구타이와 넷째 톨루이를 기독교 여성들과 결혼시켰다. 징기스칸에 이어 대카안(황제)이 된 오구타이는 메르키트족 토레게나(Toregena)와 결혼했고, 징기스칸 사후 임시 대칸(1227-1229)을 지낸 막내 톨루이는 케라이트족 공주 소르칵타니 베키(Sorqoqtani-Beki)와 결혼했다. 칸의 본거지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징기스칸의 손자 손녀들은 기독교 신앙을 존중하도록 양육되었다. 소르칵타니와 그 자녀들 주위에는 언제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몰려들었다.
◇톨루이와 소르칵타니의 아들들은 몽케, 훌레구, 쿠빌라이, 아릭 부케이다. 몽케는 제4대 대카안으로 황제가 되었고, 훌레구는 이란에서 일칸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며, 쿠빌라이는 중국에 원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릭 부케는 몽케를 이어 몽골의 대카안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인 소르칵타니의 네 아들들은 모두 황제가 되었다. 심지어 소르칵타니는 섭정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따라 궁정에는 수 많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사실상 몽골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동양의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는 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서방 라틴 로마교회나 동방 그리스 정교회는 동양의 네스토리우스교도는 가톨릭 유럽의 친구도 형제도 아니고, 이단이자 적일 뿐이라고 여겼다. 이는 순전히 자신들과 교리와 역사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초원 지대 유목민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어도 그리스인들 눈에는 여전히 야만인이었고, 라틴인들 눈에는 여전히 미개인이었으며, 이교도는 아니지만 이단자들이었다. 서방 기독교는 동양의 네스토리우스교회를 같은 그리스도교회의 형제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정교도들은 교리의 문제보다 마유주(馬乳酒)를 마시는 것을 죄로 여겨 마유주를 마시는 유목민들을 마치 기독교 신앙을 버린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마유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리주의가 낳은 맹점이다.
◇기독교가 본래의 가르침대로 복음전파에만 충실했다면 세계는 지금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그 모습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 기독교의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이때 놓친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에서 꽃을 피었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서방교회와 단절된 채 900여년을 버티다가 초원에서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8백여년이 지난 지금 복음은 아메리카를 거쳐 다시 동양에 상륙하여 그 옛날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이루고자 했던 초원 지대의 복음화의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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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지대의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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