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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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일체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내용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22절이나 4장 1~16절에서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의 무리입니다. 교회란 과정일 뿐이요, 진행입니다. 즉 임시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정착을 위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수단일 뿐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거하였으니.”

교회는 출애굽 후 광야의 삶입니다. 항상 이동형이요, 광야교회입니다. 언제나 이동할 수 있도록 성막을 비롯해 법궤나 번제단 등 백성의 장막 기구들은 한결같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꿸 채와 고리가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이 보이고 함께 살 이유를 발견하여 교회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위협은 정착을 강조합니다. 불균형적 상태는 마귀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마귀의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계략은 정착하기 위한 방법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가 나그네의 삶이라고 강조하지만 수백 년을 버텨낼 돌집을 짓고 지속적으로 수양관, 교육관, 기도원, 묘지까지 세상의 보장을 쌓아놓는 이유가 교회의 타락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리에서 벗어나 마귀의 관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꿈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병들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교회가 병들기 시작한 것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부터였습니다. 나그네적 개념이 정착으로 변화된 요인이기에 예수님은 이 거대한 인간적 최대의 충성심이란 예루살렘 성전이 신당으로 타락된 집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지속적으로 인간의 탈교회의 꿈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앓는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솔로몬의 희망사항으로 고백했던 그 고백을 한국교회는 반복되어 성전이라고 이름한 교회당을 짓고 헌당 예배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 12절을 보시면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니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솔로몬의 성전을 현대적인 교회건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보시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있느니라.”

교회는 전투적 의미입니다. 죄악과 싸움이 아니라 세상 권세와의 싸움입니다.
세상 권세와의 싸움이란(세상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전투적이란 의미를 대항적 전쟁의 개념이 아닙니다. 교회의 의미는 확신입니다. 악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악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맡겼는데 마귀는 여자를 선택하여 에덴의 삶을 잃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선택하였으나 가인은 마귀를 선택하여 아벨을 죽였습니다. 다시 셋을 낳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인간이 부패하여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였습니다.
이 같은 싸움은 중세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훈련도 가나안의 전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현대교회의 무력함도 전투를 위한 군사적 영적 의미의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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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는 쉬운 것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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