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jpg
 C-레이션(Combat Ration)은 미군들의 전투식량으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다.
내가 C-레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남한에 사는 국민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보내준 옥수수가루와 분유를 받아먹을 때였다. 한번은 갈색종이상자에 든 것을 배급받았다. 그것도 가구당 1개 정도는 다 받았던 것 같다.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크고 부자이기에 옥수수가루와 우유가루에 이런 것까지 다 보내주는가 싶어 감격했고 몹시 부러웠다.
우리는 영어를 읽을 줄 몰라 그냥 열고 보니 국방색 깡통이 쏟아져 나왔다. 깡통따개가 들어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수단방법을 다 써서 뚜껑을 열고 보니 각각 다른 음식물이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 빵, 복숭아통조림, 콩이 섞인 돼지고기, 감자를 으깨어 섞은 닭고기볶음, 비스킷 등이었다. 그 외에도 작은 약봉지 같은 질긴 갈색종이봉지에는 설탕, 분유, 검정가루, 소금, 후추가루가 들어있었고, 별도로 카멜양담배 4개비에 성냥과 바둑 껌까지 들어있어 요즘의 표현으로 환상적인 종합선물세트였다.
그 중에 작은 종이봉지에 든 설탕과 분유는 달고 좋았는데, 알 수 없는 검정가루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급한 김에 설탕처럼 먹어보려다 소태처럼 쓴맛에 놀라 내버려뒀는데 침이 묻은 부분이 굳어져서 고약처럼 돼 버렸다. 누군가가 다친데 바르라는 약인 게라고 해서 환처에다 발랐는데 나았다는 것이다. 나도 다친 무릎에다 그것을 발랐다.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에서는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 C-레이션 박스를 많이 사용했다. 나는 6·25 전쟁 때부터 시작하여 카투사와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C-레이션을 많이도 먹었다.
카투사하사관으로 왜관 캠프캐롤에서 복무하던 1965년 여름, 폭우로 전방의 미군진지에 피해가 발생했다. 내가 소속한 미44공병부대가 화물열차에 장비와 C-레이션을 잔득 의정부로 향했다. 한강을 건너 동부이촌동을 지나게 되는데 철로주변이 온통 판자집들이라 천천히 달리게 되었다. 미군 화물열차를 보고 아이들이 달려 나와 무엇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화차 뒤 칸에 잔득 실린 박스를 풀어 무조건 밖으로 던지게 했다. 그것은 그냥 싣고 갈뿐 그 숫자나 처리에는 무관심 할 정도로 물자가 풍성했고, 화차에 실린 것은 내 책임으로 처분할 수가 있었기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맘껏 인심을 써버렸다.
의정부역에 도착하여 트럭에 옮겨 타고 달려간 곳은 경기도의 끝자락 운천이었다. 그곳에는 캠프 카이져라는 병영에 미7사단의 1개 여단이 주둔하고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리틀타이거라는 태국군 부대가 있었다.
캠프내의 제반시설이 왜관 캠프캐롤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서울에도 잔디구장이 없을 때인데 야구를 즐기며 미식축구를 하느라 잔디가 넓게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C-레이션은 관심 밖이었고 식당에서 A-레이션으로 제때 조리해 주는 식사를 하면서 한 달여를 지내다가 왜관 캠프캐롤로 복귀했다.
1940대로부터 60년대까지가 미국의 최전성기였다. 해외주둔미군들에 대한 예우는 당시 미국의 중산층이 먹는 식단과 생활수준이라고 했다.
미군들 식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이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훈련된 미군이 세계유일의 최강의 군대인 것을 식사에서부터 알아볼 수가 있었다.
A-레이션(A-Ration)은 고정된 부대에서 일상적으로 빵을 굽고 계란, 고기류, 신선한 야채 등으로 조리를 해서 먹는 식사다. B-레이션(B-Ration)은 야외에서 집단으로 훈련을 할 때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단을 말한다.
나는 미군들과 문화탐방과 해수욕을 갈 때나 밖으로 외출을 할 때 식당에서 싸주는 점심을 가지고 다녔다. 아무데서나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와 종이팩에든 우유나 주스, 오렌지나 사과를 봉투에 넣어 다녔는데 그런 게 B-레이션이었다.
C-레이션은 문자 그대로는 전투를 할 때 먹는 비상식량이다.
미군은 195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는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한 박스에 12개가 들어 있었다. 간단하게 한 박스만 가지면 참호에 들어가 조리를 하지 않아도 골고루 먹으면서 나흘이상 싸울 수가 있었으니 대단한 아이디어의 전투식량이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그것이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식량이었지만 베트남인들이 더 좋아했고 베트콩들에게도 이상적인 전투식량이 되는 생명줄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미군들의 보급기지 캄란에서 그것을 트럭이나 큰 트레일러로 싣고 나오다 샛길로 빠져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게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결국에는 베트콩들의 전투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군과 적이 미군의 전투식량을 나누어 먹으면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서 얼마간 보급차량을 호송하는 칸보이 소대장이었다. 처음 나간 작전이 C-레이션과 철조망, 판자, 양철, 모기장 등을 12대의 트럭에 싣고 캄란에서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는 팜랑까지 운송하는 작전이었다. 선두의 지프차에는 나와 운전병 이외도 뒤좌석에 기관총사수와 또 한 명의 무전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위장한 철모에 미제 방탄조끼를 입고 완전무장으로 출동을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가장 위험하고 적의 타깃이 되는 것이 바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 차량의 선두호송차량이었다. 각 트럭에는 운전병과 조수가 M16으로 무장을 한 상태로 식사용 C-레이션을 싣고 다녔다. 정글사이나 들판을 지나 해안가로 가는 곳도 있었지만 도로의 사정이 좋지 않아 기습을 받을 우려가 많았다.
어느 날은 캄란에서 17대의 차량에 C-레이션과 보급품을 실고 투이호아로 가는 작전이었다. 캄란기지를 벗어나 해안가에서 휴식을 하게 되었을 때 선임하사관이 소대장님을 위하여 특식을 만들겠다며 수류탄 투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요청했다. 조심하라고 허락하였더니 바다로 흐르는 물에다 수류탄 몇 발을 투척하여 숭어를 잔득 건져와 전투식량에서 나온 소금을 쳐서 구워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요즘도 그때의 정경이 가끔 떠오른다.
투이호아는 백마부대가 맹호부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북쪽으로 지형이 험난한 곳이라고 했다. 차량 17대를 이끌고 백마사단사령부가 있는 닌호아의 해변 야자수 아래에서 C-레이션으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해풍을 맞으러 놀러 나온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자니 전쟁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장거리 소풍을 가는 것처럼 투이호아를 향해 이동하는데 해안이 끝나면서 큰 산악이 앞을 가로 막았다. 간이역이 있는 마을 앞 철로에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베트콩들에게 당한 기관차와 객차가 넘어져 불에 타고 있었다. 일단은 경계를 하면서도 병사들은 비슷한 광경을 늘 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우리는 차량들을 세우고 경계를 하면서 마을로 들어갔다. 우리가 온 것을 보고 몰려나온 어린아이들과 주민들에게 C-레이션을 나누어 주면서 야자수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총으로 쏴서 따먹으라는 것이다.
선임하사관과 고참병들이 M16을 냅다 쏘아 올려 야자수열매를 몽땅 떨어뜨렸다. 온수가 되어버린 수통의 물 대신 시원한 야자수액을 양껏 마시고 몇 개씩을 챙긴 다음 대관령 같은 험준한 바위산 길에 접어들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베트콩이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을 해올 것 같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여 꼼짝없이 당했구나 싶어 순간적으로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첫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이르면 오히려 차분해 지고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가 싶었다. 내 지프차에서도 기관총이 발사되면서 커브를 도는데 아군 뒤를 돌아보니 헬기가 기총사격을 해대는 게 보였다. 내 뒤로 보급차량이 오리새끼들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돌아 온지도 반세기가 다 됐다. 6·25 전쟁까지 심하게 겪은 탓에 늘 먼 곳으로 피하고 싶어져서 깊고 낮설은 산을 찾아 오르며 C-레이션을 떠 올린다. 적이 공격해 올 것 같은 생각에 경계를 하며 계절과 웬만한 날씨에도 산행을 하면서 배가 고파 도시락을 먹을 때면 피난 때의 치열한 전황을 떠올리게 된다.
2016년 8월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수필 - 최건차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