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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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들이 대형화되고 물질과 권력이 풍요해지면서, 교회의 비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이 교회론에 잠식되었거나,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 혹은 교회론적인 성령론으로 질서가 왜곡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만큼 성령론을 왜곡시키고, 성령의 선물들을 부끄러워하고, 성령의 은사들이 무시되고,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임재가 이렇게 한국교회에서 퇴색되어진 때는 없었던 것이다. 저마다 교회의 성장에 욕심을 과하게 채우려하다 보니, 교회 자체가 갖추었어야할 열매들이 빈궁한데다가, 신도 개개인에게 갖추어져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이 매우 궁핍해진 것이다. 교회들과 교단들이 교황청이나 교황보다도 얼마나 강하게 비춰지는지, 서로가 양보하질 않고 대치하는 것을 보아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나 여력이 모두 소진된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 교회가 쇠퇴해지고 패망하였을 때에, ‘누가’는 ‘성령론적인 교회론’의 깃발을 올리고 새로운 교회로서의 항해를 시작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교회의 주도권을 제사장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넘기질 않는다. 이미 사제권을 발동하던 성전중심의 교회제도가 패망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의 중심에 있으면서, 제도권의 권좌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제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어단 이후로는 이천년 넘도록, 그런 성전을 다시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사도행전을 설교하면서도, 누가가 세우려는 교회보다는, 패망한 사제집단들이 고수하던 성전중심의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행보인가?
누가는 사도들의 행전에서 조차도 사도들에게 주도권을 주질 않았다. 사도행전에서는 마치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그의 교회를 넘기려는 듯이 하질 않았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다행스럽게 모세의 후유증상에서 한층 자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마저도 모세의 손길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야훼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가가 믿음으로서 황톳물로 넘쳐나는 요단강을 넘어설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모세에게 예속되질 않고, 모세의 그림자에게서 떠나 여리고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는 예루살렘 패망 이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결코 사도들 중 누구 하나를 특화시키질 않았다. 누가는 보편적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는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 하였다. 누가는 마치 한 인간의 권력이나 제도에 의해서 교회가 서게 되는 것처럼 복음서를 구성하질 않았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 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에도, 누가는 그 핍박의 모진 파고와 풍랑을 이겨내는 영예를 사도들에게 주질 아니하고, 일곱 집사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게 된, 얼마 안 되는 헬라 말을 하던 유대 교민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이 오늘의 교권을 주장하는 제도권처럼, 사람에게 매여 기록이 되었더라면, 전혀 지금의 사도행전 같은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측하여 본다면, 먼저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러고 나서 다른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고, 아마도 추측하건데, 일반 신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게 됨으로서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누가는 심지어 바울에게도 사적인 특권을 부여하질 않았다. 바울에게도 바나바와 같은, 교회가 파송한,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의 칭호를 사용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적인 역량과 권능을 갖추었음에는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위탁하였던 것이다. 잘못 관찰되면, 바울이 마치 예루살렘의 제도권의 권위 아래에 있는 듯하지만, 그는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사도로서의 사역에 힘썼던 것이다. 사마리아 교회가 마치 사도들의 안수로 인해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인식되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마리아의 구원마저도 성령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교회론적인 성령론이 아니고, 성령론적인 교회를 세우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가증된 것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차지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누가의 강령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와 같이, 그 자리를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내어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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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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