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k-a.jpg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쓴 우화에는 재미있는 ‘고슴도치 딜레마’의 이야기다 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 마리 고슴도치가 서로 몸을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침에 찔려 아프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온기를 나눌 수 없어 적정 거리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이다. 이를 일컬어 ‘고슴도치의 딜레마’라 하고 또 이런 고슴도치들의 적정 거리 간격을 예절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 란 합당한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의미 한다. ‘예’는 왜 지켜야 하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이 예의 없고 품격 없으면 금세 싫증 나듯 그 누구도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인사하는 것, 하나를 보더라도 그가 교양이 있는지 품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부드러운 미소, 헤어스타일, 좋은 목소리, 단정한 옷차림, 절도 있는 동작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이 준비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예절은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예의라는 그릇에 격식을 갖추어 나 올때 품위 있고 존경스럽다. 아울러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면 소인배들이 모여 든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과 교제 할 수 있다. 고로 실력 이전에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이라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된다. 예의도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무례히 행지 말아야 한다. ‘무례’(헬.아스케모네이)란 말은 공정치 않게 행동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것은 첫째로 공중을 위한 예의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는 주님의 지체요. 고립되어 자행자지할 사람이 아니다. 개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인륜상의 질서도 더욱 강화 할지언정 약체화 시키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는가(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 6)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눅 18:4절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라고 하여 양자의 관련성을 암시 한다.
둘째로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역시 무례이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의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레19). 고로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의식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 시킨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무례할까? 세 가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돈병, 색병, 이름병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무서운 것이 이름병이다. 돈병이나 색병에 걸리면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줘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여간해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정치인이며 고위 공직자며 사업가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불의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다가 평생 힘들게 쌓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은 여러 번의 불운이나 실패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단 한번으로 영원한 파멸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에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단의 유혹을 받아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을 물리치지 않으면 영과 육이 망한다. 이제 우리는 무례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스탠튼처럼 링컨을 모욕한 사람은 없다고 포스딕은 말했다. 스탠튼은 링컨을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했다. 또 ‘고릴라의 원종’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듀 샤일류는 ‘바보보다 고릴라를 잡자면 일리노이스주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간단 할 텐데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게 뭐란 말이야’라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링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탠튼 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직임에는 스탠튼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링컨은 최대의 예절을 다해서 스탠튼을 대우해 주었다. 세월이 흘러 극장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링컨이 쓰러진 날 밤이 왔다. 그날 밤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좁은 방에 스탠튼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말없이 누워 있는 링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에 세계 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고 말했다. 사랑에 의한 인내가 드디어 승리하였던 것이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고슴도치의 딜레마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