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jpg
 신약전서 마태복음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리스도의 계보란,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의 족보라는 말이다. 메시아의 계보이니 얼마나 거룩하겠느냐 마는,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아무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고, 사람 냄새가 물씬물씬 배어있는 역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셨으니, 짐승의 우리에서 나는 냄새 뿐 아니라, 사람 냄새도 흠뻑 젖어있는 것이다. 랍비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마저도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그 이야기들을 경전처럼 귀히 여겨서 백성들로 하여금 외우고 낭독하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랍비들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정제된 이야기로 갖추어지면, 또 다시 그 이야기들은 랍비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낭독하며 토론하고 재해석하는데, 그 모두가 개개인과 사회의 지혜가 되는 바탕이 되었다.
랍비들 못지않은 우리 신약 기자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땅에서는 설교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서는 즉시 축도하고 내려오는 바람에, 그 이야기는 우리네 이야기가 되질 아니하고, 다시금 경전 속으로 숨어버린다. 영국에서는 영어로 서민들에게 읽혀지도록 성경을 번역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민들도 글을 읽고 쓰고 볼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광경은 영국과 우리 땅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그런데 우리네는 거기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성경을 읽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시킨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도들 영성이 깊지 못한 것이 이것과 전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메시아의 계보 소개가 마치자, 야곱이 낳은 요셉, 곧 마리아라는 처녀와 정혼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중심이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 중심’으로 엮어 졌으나, 마태에게선 그녀와 정혼된 ‘요셉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아마도 이야기꾼이나 희곡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나, 촬영장에서 영화를 감독하는 이라면 더더욱 ‘요셉 중심’의 스토리를 놓칠 리는 만무할 것이리라.
 부모님들에 의해서 정혼되어 혼사 날을 기다리던 요셉이란 청년은 갑작스런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된다. 마리아란 처녀가 임신을 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오래 전에 나사렛 마을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 곳의 정혼된 처녀가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의 아비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던지, 그만 자신의 딸을 돌로 쳐 죽인지 채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지방은 혼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 일인지를 시사 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신부 측 아비가 혼례식 첫 날 밤에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신부의 방에서 나온 하얀 손수건에 묻힌 그 붉은 색을 보고서는, 동리사람들에게 ‘이것을 보라’라고 소리를 치면, 통과 례가 방점을 찍고 잔치의 흥은 더욱 깊어만 간다.
오늘의 젊은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처사를 해결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요셉이 소문들을 들었을 때에는, 동리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나, 집안의 어른들의 근심을 모른 채 할 수 없게 된 터이었다. 공이 마리아에게서 요셉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요셉의 생각이 깊질 못하다면, 그 처녀는 그 날 밤에 돌무더기에 덥힌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마을에서 이러한 일들이 항시 있어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도 비쳐진 바이다. 종교재판이나 인민재판에는 승자가 없다.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이다. 오늘 날에 시청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 집회도 역사적인 어리석음에서 자유하질 못하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마저도 회당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서 못질을 하고는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죽게 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가 태어나서 개혁을 일으킨 지 오백년이 되도록 신학자들마저도 덮어 버린 것이었지만, 아벨의 피는 여전히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만연된 죄악과 지나친 분노와 위장된 거짓들을 천사에 의존하여 풀어 간다. 이러한 일들에서 굳이 천사의 도움을 받음은 사람이 결코 해결하지 못해서일까? 요셉처럼 혼란스러움에 빠지면 정말 천사가 달려오기는 하는 것일까? ‘신의 일식’처럼 광기에 취한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을 가스실로 내몬 처사를 보면, 지옥마저도 지금의 북한처럼 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알았고, 해가 떠오르기 전, 그녀에게 즉시 달려가, 증오와 광기에 노출된 그 여인이 돌무더기에 덮여지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의 메시아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성육신한 예수교회-33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