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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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저물어 가면 곳곳에서 교역자들도 평생을 헌신한 목회를 내려놓고 퇴임을 하는데, 농촌 지역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교역자들이 조용히 사역을 내려놓고 떠나간다. 한 오지 마을의 여교역자가 은퇴하는 예배에 참여했다. 여느 교회들은 은퇴식에서도 사람들에게 감투를 씌우는 행사를 끼어 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교회는 전혀 달랐다. 모처럼 마을에 사는 분들도 많이 나와서 환대하는 것이었다. 주변 교회에서도 다들 와서 함께 감사하며, 전도사님의 앞길을 축복해 주고, 참여하신 하객들도 그 마음에 무언가 훈훈함이 가득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느 행사보다도 사뭇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은 으레 모이면 조직을 하고, 회장을 세우고, 모집책을 맡아 고생하는 총무도 세워서 이내 질서를 잡는다. 조직이 형성되면 옛날 반상제도가 있던 때의 계급과, 식민지의 완장을 찬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문화에 익수해진 터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곧 잘 적응을 한다. 교역자들이 모임을 갖는 노회나 총회도 가서 보면, 그 곳에서도 제일 먼저 감투 씌우는 일부터 하는 데, 연합회 모임이나 친목회 모임조차도 이와 다르질 않다. 더더욱 교회 행사 때에도 초청을 받아서 가보면, 사람들의 직급을 높여주고 감투 씌우는 행사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피라미드 조직을 갖추고 예전을 치루는 것을 좋아했지만, 교회에 이러려고 나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담임전도사님 은퇴식 자리에서, 순서를 맡은 그 교회의 신도가 내빈들에게 인사 말씀을 하는데, 그가 어릴 적에 이 전도사님을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분은 법학을 전공한 분이기도 했는데, 항시 사물을 관찰할 때에 귀납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을 곁에서 항시 지켜보면서, 그녀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심중에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그 분을 통해서 느꼈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쳐지기에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변하였고,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섬기는 예수님을 붙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교역자가 그렇게 사람을 움직이고, 그들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고, 신도들의 삶에 진전을 가져온 것들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섬기는 교회의 당회장은 따로 있었는데, 그녀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마다하고, 당회장의 자리마저도 비워 논 채 사역을 한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례 적으로 하는 직급 놀이에서 벗어나서, 욕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목양에만 집중한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몇 년간 그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정말 권세 있는 교훈을 가진 분임을 느꼈다. 사람들은 외형적으로는 사제들이 치장한 옷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것이 없어도 권능을 갖춘 것이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귀신들린 자를 만났을 때에, 귀신을 병인에게서 쫓아내고 건강한 사람으로 되돌려놓은 것처럼, 그녀도 신도들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교역자의 형제들도 그날 거기에 와서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형제들도 모두 목회자이다. 그 형제 중에 한 분도 주변 오지에 들어가 개척을 하고 한 평생 목회를 하였는데, 그도 그의 누님이 갖추고 있는 권능을 갖추었다. 그분의 교회 신도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정말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목회자이다.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현저히 나타나는 그 무엇은, 세속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오직 복음서를 읽어야만 나타나는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그녀의 형제들이 목회하는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도시에서 프로그램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야기들일 것이다.
요한 서신에서 ‘메시아가 여기 있다 하여도 쫓아가질 말며, 저기 있다하여도 쏠리질 말라’하는 삼가 경고의 가르침처럼, 요즈음같이 열심히 밭을 일구고, 아무리 좋은 씨를 밭에 뿌렸다 하더라도, 밤이 되면 도적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분별하기 어려운, 유사한 나쁜 씨들을 수없이 뿌려놓고 가는 판국이니, 알곡과 가라지를 식별하는 일에 일대의 혼란이 온 것이다. 제관식을 거행하며 가운을 입혀주는 일들이 일상화된 세대에서, 사제복을 입은 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그리스도께서 보이셨음을 경전에서는 읽었으나, 저들은 어떻게 그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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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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