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한 예수교회-47
2017/05/04 10:4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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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종교들의 가르침을 보면, 경전의 가르침들을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듯, 서로의 장점들을 채용해서인지 비슷한 점들이 많아졌다. 각 종단에서 심리학을 적용해서 신도들을 치료하는 것들을 보노라면, 개신교라고해서 별다른 것이 없다. 신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걷는 구원의 길이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개신교 신학을 수강했듯이, 유대 랍비가 신약성경과 주석, 신학 서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의 가르침은 백성들을 인도하는 점에 있어서 버전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마다 공통점이 있게 되고, 사회성이나 공중 도덕성에 있어서 저마다 품격이 높아지고 스마트해진다면 사회는 전반적으로 좋은 세상을 지향하게 될 것이리라.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세계적인 도시의 한 쌍둥이빌딩이 공격을 받은 때이다. 이 기관의 책임자인 회장이나 수석 부회장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이날 한 사람은 출근을 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침에 마신 주스로 속이 불편해 져서 화장실에 드나들다가 조금 늦게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의 공격을 목도하게 되었다. 한 분은 유대 율법을 실천하는 자이고, 한 분은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다. 이 두 분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책임감이 높고, 지구촌에서도 귀감이 될 만한, 도덕적 지수도 높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화를 입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구약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었고, 한분은 신약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중이었다. 한분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한’ 경제면에서의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고, 한 분은 그 논문을 읽고 그를 채용한 분이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이렇게 탁월한 분들이 한 곳에서 공통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조화를 이뤄 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리라.
바울은 다양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시에 ‘로마서’ 서신을 여 집사로 알려진 뵈뵈를 통해서 전달하였다. 이 시민들 중에는 신앙문제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자, 로마당국으로부터 그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이들이다. AD 80년 즈음, 지중해 연안인 야브네 랍비들 그룹에서 사람을 한 지역에 파송할 때에는, 파송된 자는 랍비의 권위를 갖고서, 랍비의 지침과 명령을 전달하였다. 파송 목적이 달성 되었을 때에는 그 특별한 권한이 종료되거나, 지속적으로 그 지역의 영적 권위자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던 로마 분쟁 지역에, 사도 바울은 남자도 아닌 여인에게 자신이 평생 사역하며 가르치며 전파해온 ‘그의 복음 로마서’를 넘겨주고서는, 미련 없이 훌쩍 사지(死地)로 나간 것이었다.
로마서 서신이 끝나가는 결미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라성 같은 분들이 이미 로마에 들어가 있었다. 네로 황제의 등극과 함께 로마 수도로 기독교 유대인들이 귀환하였을 때에는 저들은 이미 소수가 되어있었다. 잠시 떠나있는 동안에, 로마인들로 구성된 크리스천들이 상당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귀국한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율법만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한 도시에 살게 되었으니 분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이미 국외로 추방되었던 경험을 한 터이라서, 고린도나 빌립보나 에베소에서 같이 지나치게 소란을 떠는 일들은 없었다. 그러나 조용한 듯이 일어나는 분쟁일지라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유대인들이 모일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되는 바람에 가정집에서 모여야 했고, 이 같이 조심스러운 환경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다. 서로가 절제된 펀치를 날리게 되었을 것이고, 질서 있고 신사적인 토론으로 인해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어서 공동체는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랍비들이 그들 신도들중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을 보면, 613가지 율법 중에서 ‘하지마라’는 365조항에 저촉된 생활을 하는 부류를 가리키고, ‘이렇게 하라’는 248가지의 조항을 적극 따르는 신도들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 안에서 장사지내고, 다시 사신 예수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가치관’을 지향하는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다룬다. 이렇게 상이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바울의 ‘복음’과 그가 전해 주려하는 ‘성령의 은사들’을 여 집사 뵈뵈가 어떻게 전하였기에, 바울이 도착한 항구에 저렇게 밝은 얼굴들로 나와서 사도를 맞이하게 될 수 있었을까? 이는 필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본을 보인 뵈뵈에게서 그 비결을 찾아야 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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