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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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남 대동군 출신
이성택(李聖澤 1919. 2. 17) 목사는 평남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 역시 조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참담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철없는 어린 시절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기독교의 요람이었던 평양인근에서 태어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평양은 평안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대동군에 둘러 쌓여 있으며, 남쪽은 중화군(中和郡)에 접해 있고 4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서 단군왕검이 도읍한 이래 기자, 조선, 낙랑,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며, 조선개국 이래 북쪽의 관문 의주로 연결되어 있어 대륙으로부터는 조선 입구의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1866년 중국에서 선교하던 로버트 토마스(Rev. Robert Jermain Thomas, 崔蘭軒) 목사가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병사들에게 배포하다.   순교의 피를 흘린 이래, 복음의 사역자들이 이곳을 향해 계속 들어와 폐쇄사회로 일관했던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목숨을 받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복음의 선각자들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어질만큼 평양은 어두운 18세기 역사를 뒤로 하고 서서히 밝고 희망찬 새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의 답사 이후 마포삼열(Rev. Samuel Moffett 1864. 1. 25~1939. 10. 24) 선교사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조선의 기독교의 복음의 횃불을 들었던 것이다.
소년 이성택이 태어난 대보면은 평양에서 그리 멀지않은 진남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이어서 자연히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았고, 급기야 고향 대보면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고향교회에 출입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었고, 이웃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취명학교에 입학해 1932년에 졸업하였다.

1948년 2월 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운동
1·4후퇴 때 가족 두고 혈혈단신 월남
피난 중 대구에서 총회신학교 졸업
김제 가실교회·대구 신일교회·서울 평안교회서 시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창립 멤버

암울한 일제하에서나마 건전한 신앙 덕택으로 애국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를 기독교 신앙을 통해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해방 이듬해 1946년 평양노회에서 운영하던 득신고등성경학교에 입학, 복음전도자 수업을 닦기 시작했으며, 1948년 2월 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가 12명의 동료와 함께 중퇴하고 만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해 10월 UN군 참전으로 북진하는 국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어 회복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대포면에서 평양으로 나와 잠시 머물며 전세를 광망하였다. 그때 미8군 부대에서 노역(勞役)을 하던 중,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그 해 12월 중공군의 합세로 밀려나자 이듬해 1월 4일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당시 평양에 진주했던 군당국에서는(헌병대) 짧게는 7일, 아니면 늦어도 한달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온 가족을 북한에 남겨둔채 혼자 성경 찬송만 손에 들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 오늘에 이르렀고, 언필칭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이성택 목사는 모든 면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그의 마음과 얼굴 한 구석에는 남이 알 수 없는 수심이 드리어져 있다. 그는 월남한 후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눈물의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대구에까지 내려가 전쟁 중에도 대구서문교회(당시 명신홍 목사 시무)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 “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 예과에 입학, 고학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1956년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가실교회(김제시 진봉면 가실리 92)에 부임하여 만 3년 동안 열심으로 섬기었다.
이곳에서 사역하던 중 피난민들 중심으로 갓 출발한 대구 신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목회지를 전북에서 대구로 옮겨, 이곳에서 16년간 독신의 몸으로 최선을 다해 목회의 황금기를 보내었다.
1956년 당시 한국교회 월남교역자들의 중혼문제가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등에서도 불거져 큰 이슈가 되고 있던 터다. 예장 교단 안에서도 문제가 되어 재혼한 목사들 중엔 개교회를 사임하기도 하고, 교단으로부터도 징계를 받는 일들이 생기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성택 목사는 지혜롭게 독신으로 일관하여 주위로부터 성자(聖者)라는 칭송을 받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잠시 전란을 피해 고향을 등진 것이 50년, 60년의 세월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성택 목사는 피난해 나온 이후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온전히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과 경건함을 인정받아 교단을 이끌어가는 총회장에 이른지도 모른다.
1976년 대구 신일교회 사역을 마감하고 증경총회장 김윤찬 목사(제49회, 52회 총회장 역임) 후임으로 서울 평안교회(중구 순화동 6-9) 담임목사(1976. 9. 10)로 부임 원로목사(1996. 1. 2)로 추대되고 퇴임하기까지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마감하였다.
그는 일선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속한 평양노회와 예장총회를 위하여, 또 사회선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섬김의 본을 보이기도 했다. 1978년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동평양노회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82년 총회군목부장으로, 1987년 군복음화후원회 이사로, 1988년 9월에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이듬해(1989년) 9월 12일에서 22일까지 모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4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인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총회장을 역임한 이후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교단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그의 목회철학을 엿볼수 있는 설교 한편을 요약해 본다. 성경 누가복음 5장 1~11절을 본문으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그의 신앙과 인생관, 목회관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씀 속에 베드로의 속마음과 신앙이 주님의 마음에 꼭들어 맞았다고 설파한다.
이 말 속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명에 따라 그물을 던진 그속에는 배 두 척도 모자랄 정도로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란 고백 속에는 입버릇처럼 하는 껍데기 회개, 입술로만의 회개류에 속하는 회개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과 순종은 꼬리가 아닌 머리되는 지름길이요, 이것이 제자 아닌 수제자의 길로 가는 지름길임을 그는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고온 가족들, 성도들, 교회를 생각하면 이성택 목사는 늘 하나님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 밖에 고백할 말이 없었다고 생각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서울, p.150-153).
그는 평안교회를 사임한 후 지금까지 교회의 성원과 배려로 평생을 가르치고 설교했던 주옥같은 성경적 메세지를 <나의 경건생활>이란 제목으로 책을 간행하고 있다.(제1권 2015년 3월, 제2권 2015년 9월, 제3권 2016년 7월, 제4권 2017년 6월 간행되었고, 제5권이 이어 간행될 예정이다.)
그 내용을 살펴 보건대 군더더기 없는 순수성경본문 중심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목회자들과 한국교회를 향한 저자의 필생이 담긴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성광문화사, 2015 서울).
그가 재임했던 예장총회 제74회 총회 결의안을 몇가지 요약하면, 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인준하고 총회장은 대정부 대외관계에 자유로이 참여하도록 하다. ② 녹화방송예배는 예배모범에 위반된다고 결의하다. ③ 동서울노회 분립을 허락하다(동서울노회, 서울동노회) ④ 강원노회 분립을 허락하다(강원노회, 북강원노회) ⑤ 총회에 은급부를 신설키로 가결하다. ⑥ 김기동씨를 이단으로 규정하다. ⑦ 십자가 강단 부착건은 1957년도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부착할 수 없다고 결의하다.
이성택 목사는 퇴임 이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평안교회와 교단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 남북통일의 그날을 기대하며 쉬임없는 기도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이 이성택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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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제74회 총회장 이성택(李聖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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