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한 예수교회-55
2017/08/24 10:3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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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거룩’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안식일’과 관련해서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가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백성들에게 거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곳이 지상에 위치를 두게 되었는데,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텐트를 치신 성막이었다. 이 세 가지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유대 교부들의 윤리인 Pirkei Avote를 보면 세상을 떠 바치는 세 개의 기둥을 다룬다. 이 중에 한 개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고, 남은 하나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선한 행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떠 바치는 세 가지의 기둥 중에 한 개라도 부재하면, 저들 이스라엘은 존속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중의 한 개가 제 2성전이 건축된 이후 다시 무너진 것이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붕괴된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워지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려면 거룩하여져야 하는데,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인 성전에서의 예배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성전의 역할이란, 하나님께 백성들이 나아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다시금 야훼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계약을 갱신하며, 그의 부르심과 의무에 충성을 다짐하며, 야훼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새롭게 짐을 지고,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과 기능인 제사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 야브네에서의 랍비 공동체는 바빌론 포수기와 같은 대처를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용어를 ‘말씀’앞에 나아간다는 용어로, 성전 제사를 모두 ‘기도’로 대치하였다.
‘성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장소에 국한되던 성소 개념을 ‘시간의 지성소’인 ‘안식일’로 대치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말씀’과 ‘기도’와 ‘선한 행실’로 전환하였다. 이는 거룩한 처소 역할이 장소에서 시간으로 넘어가게 되고, 예배가 의로운 선한 행실로 넘어감으로써, 장소에 관한 경비와 관리 유지부담이 절약되었고, 신앙생활이 더욱 내실을 다지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다짐한 랍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비량으로 말씀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다.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도시에서는 회당들이 건축되어서 이를 더욱 뒷받침을 하였다. 이렇게 전환된 신앙인들의 경건생활은, 안식일이 성전에 다가가는 거룩한 시간이 되었고, 말씀 앞에서 야훼하나님을 직면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거룩한 예배가 된 것이다.
예루살렘이 붕괴되던 1세기 유럽에서도, ‘정의’개념보다는 ‘선’의 가치를 보다 위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는 사회적 가치관에서 ‘정의’가 ‘선’보다는 한계점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가 ‘공법을 하수 같이’ 흘려보내다 보면, 피비린내가 땅을 덮게 되고, 더럽혀진 땅은 항시 희생된 자의 고통소리로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질문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에 대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기 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내가 곧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야훼하나님은 ‘항상 인자를 원하시고 긍휼을 들어내시는 분’이셨다. 저들은 야훼하나님을 곧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였다.
하루는 모세가 극도의 혼란과 낙심 중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기를 요청한다. 결국 모세는 야훼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그 때에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긍휼하심이 끝이 없으심’을 인지하게 된다. 요한복음에 와서도 그와 그의 공동체가 목도한 하나님아들의 모습은 ‘은혜’ 그 실체였다. 십자가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란, 바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찾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시고 긍휼하신 본질’의 나타냄이시다. 신랑이 한 여인과 정혼을 하게 되면, 그 여인은 오직 그 신랑에게만 헌신된 거룩한 신부이다. 유대인들은 이 ‘거룩하다’는 말을 오직 정혼된 여인을 칭하는 용어로만 사용하였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라 함은 이와 같은 선에 있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거룩하심’은 저를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심’에 있다. 우리가 보아온대로, 궁전 같은 성전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통치자가 죄수가 되고, 장군들이 이등병이 되는 것이 세속의 역사라면, 우리가 다시 써 내려 가야할 거룩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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