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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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가톨릭교회는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한 종교개혁이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영국 그리고 네들란드 등을 휩쓸고, 주요 도시의 오래된 성당들이 루터파와 개혁파로 줄줄이 넘어가자, 그로부터 28년 후인 1545년 12월 이탈리아 북부 트랜트에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를 재천명하고 옹호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는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으로 교황 바울 3세가 연 공의회로서 1563년 12월까지 무려 18년간 5명의 교황(바울 3세  재위 1534-1549, 율리오 3세 재위 1550-1555, 마르첼로 2세 재위 1555, 바울 4세 재위 1555-1559, 비오 4세 재위 1559-1565)이 재위하는 기간 지속되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황제 편에서는 먼저 교회의 폐단을 개혁하고 교리를 개정하여 프로테스탄트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제국 내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자는데 있었고, 교황 편의 희망은 로마교회의 교리를 명백히 하여 교회개혁파측과 혼동하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다.  
◇교황은 “예루살렘아 기뻐하라”라는 칙서를 통해 1545년 3월 15일 공의회를 트랜트에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공의회가 논의할 주요 안건은 세 가지로 교회의 치유, 교회 개혁, 기독교 세계 평화 확보를 통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 대응을 제시했다. 교황은 공의회를 주재할 3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트랜트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개회는 연기되어 그해 12월 13일에 가서야 겨우 교황의 사절 3명과 31명의 대표들(25명의 대주교 및 주교, 6명의 수도회 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그곳 성 바질리오 주교좌 성당에서 개회되었다.
◇트랜트 공의회는 총3기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제1기(1545-1547)에는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에 대해 답했다. 먼저 성경과 전승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측이 구약의 외경을 제외한 정경 66권(신약 27권, 구약 39권)을 주장한데 대해 이를 배격하고, 정경 73권(신약 27권, 구약 46권)을 재확인했다. 사도 전승도 성경과 똑같은 애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공경할 것을 선포했다. 이어 원죄에 관해 아담의 범죄가 후손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과 세례로 원죄가 사함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주장과 세례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단죄했다. 그리고 은총으로 의롭게 된 이들이 의로움에 더욱 증진하려면 선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루터의 ‘믿음만으로’의롭게 된다고 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었다.
◇제2기(1551-1552)에는 성체성사(성찬)에서 ‘실체변화’ 교리를 확정하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에 대해 발표했다. 제3기(1562-1563)에서는 미사 곧 성체성사에서 성만찬 의미만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을 일축하고 미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성사임을 분명히 했다. 또 사제 서품과 혼인도 성례임을 확정했다. 그리고 수도자의 사유재산, 족벌주의, 교회 직무 겸직, 사회복지 활동 등을 금지하고, 대사(大赦)에 따른 금전 거래 행위를 완전히 폐지했다. 이로써 로마교회는 루터 이전의 교회와는 다른 교회로 변모하여 세계선교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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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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