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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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멸망하게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고자 한 세상은 말씀을 통한 평화로운 세상이다(사 2:1-5).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임마누엘을 약속하시고, 한 아기, 한 아들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인데,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심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 길과 요단 건너 갈릴리 등 전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비추고, 추수할 때와 전리품을 나눌 때 맛본 것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9장). 이어서 성경은 11장에도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정체와 그가 이루실 세상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1절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시작하고 10절에 다시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과 나중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수미상관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사야 11:1-10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예적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새의 뿌리, 줄기, 가지”라는 말은 모두 이새의 후손, 즉 다윗의 후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4-17; 시 89: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다윗과 같은 왕을 흠모하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렸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게 될 왕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서 7장과 9장에서는 그가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영적 존재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11장 1-5절에서도 이사야는 다시 그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오실 분을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할 것이라고 특별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타락하도록 유혹한 뱀을 심문하시고,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는 가운데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을 사주한 사탄을 짓밟아 진멸시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짓밟을 여자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사탄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진멸하려면 사탄보다 더 우월한 영적 존재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영적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메시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지혜와 분별의 영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구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 곧 이해심이다. 지도자, 특히 왕은 그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그에게는 권면과 능력의 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은 사 9:6에서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던 것과 같이 사용된 “요에츠”라는 어휘이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기획을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일종의 책사로서의 영이며, 그것을 전술에 응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권면과 능력의 영”이라는 말은 “전략과 전력의 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왕은 전략과 전력이 있어야 그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 또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자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잠언 1:9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 걸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는 데, 히브리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2:17)라고 했다. 선과 악이 지식과 동격으로 쓰여져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메리즘(merism)으로 지식을 의미한다. 선악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으며,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로 듣는 대로 만 재판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봐주고, 부자라고 해서 편견을 갖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한 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한 장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계신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살진 짐승과 어린 아이, 암소와 곰, 젖뗀 아이가 독사가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풀을 뜯게 된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 먹어야 하는 먹이 사슬의 구조 속에서는 포식자들의 식습성이 완전히 개조가 되기 전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는 이 적대적인 존재들이 그들의 모든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 한데 어울려 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 그리고 메시안익 쥬들 (Messianic Jews)은 이사야서 11장에 그려지는 이 낙원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엣 성전이 재건되고,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 의식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의 메시야가 오시는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쥐나 바퀴벌레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사자까지 풀을 먹는다니 이 세상에 그 많은 짐승들이 뜯어 먹을 풀이 있겠는가? 한 떼의 메뚜기가 한번만 지나가도 남은 것이 없이 다 황폐화 되버리는 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러한 세상을 원하실 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비유이다. 서로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는 이 숨막히는 포식자들의 세계가 메시야의 통치와 판결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이 많다. 오늘 날 학자들 가운데는 신학 용어가 모두 비유이고 은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 안에 있는 비유나 은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이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다윗의 위를 영원히 이으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9).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의 지식”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고 이중 번역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되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2:1-5에서도 세상의 민족들이 시온의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을 받음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11장에서도 여호와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불가능한 평화를 이룰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회복과 낙원은 결국 말씀으로 이루실 일이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씀으로 회복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리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여자의 후손이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는 종말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만물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성탄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이 종말적인 비전을 바라보며,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76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이사야 11:1-10)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멸망하게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고자 한 세상은 말씀을 통한 평화로운 세상이다(사 2:1-5).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임마누엘을 약속하시고, 한 아기, 한 아들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인데,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심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 길과 요단 건너 갈릴리 등 전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비추고, 추수할 때와 전리품을 나눌 때 맛본 것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9장). 이어서 성경은 11장에도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정체와 그가 이루실 세상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1절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시작하고 10절에 다시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과 나중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수미상관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사야 11:1-10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예적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새의 뿌리, 줄기, 가지”라는 말은 모두 이새의 후손, 즉 다윗의 후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4-17; 시 89: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다윗과 같은 왕을 흠모하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렸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게 될 왕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서 7장과 9장에서는 그가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영적 존재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11장 1-5절에서도 이사야는 다시 그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오실 분을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할 것이라고 특별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타락하도록 유혹한 뱀을 심문하시고,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는 가운데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을 사주한 사탄을 짓밟아 진멸시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짓밟을 여자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사탄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진멸하려면 사탄보다 더 우월한 영적 존재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영적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메시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지혜와 분별의 영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구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 곧 이해심이다. 지도자, 특히 왕은 그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그에게는 권면과 능력의 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은 사 9:6에서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던 것과 같이 사용된 “요에츠”()라는 어휘이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기획을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일종의 책사로서의 영이며, 그것을 전술에 응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권면과 능력의 영”이라는 말은 “전략과 전력의 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왕은 전략과 전력이 있어야 그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 또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자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잠언 1:9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 걸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는 데, 히브리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2:17)라고 했다. 선과 악이 지식과 동격으로 쓰여져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메리즘(merism)으로 지식을 의미한다. 선악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으며,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로 듣는 대로 만 재판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봐주고, 부자라고 해서 편견을 갖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한 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한 장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계신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살진 짐승과 어린 아이, 암소와 곰, 젖뗀 아이가 독사가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풀을 뜯게 된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 먹어야 하는 먹이 사슬의 구조 속에서는 포식자들의 식습성이 완전히 개조가 되기 전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는 이 적대적인 존재들이 그들의 모든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 한데 어울려 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 그리고 메시안익 쥬들 (Messianic Jews)은 이사야서 11장에 그려지는 이 낙원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엣 성전이 재건되고,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 의식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의 메시야가 오시는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쥐나 바퀴벌레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사자까지 풀을 먹는다니 이 세상에 그 많은 짐승들이 뜯어 먹을 풀이 있겠는가? 한 떼의 메뚜기가 한번만 지나가도 남은 것이 없이 다 황폐화 되버리는 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러한 세상을 원하실 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비유이다. 서로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는 이 숨막히는 포식자들의 세계가 메시야의 통치와 판결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이 많다. 오늘 날 학자들 가운데는 신학 용어가 모두 비유이고 은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 안에 있는 비유나 은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이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다윗의 위를 영원히 이으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9).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의 지식”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고 이중 번역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되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2:1-5에서도 세상의 민족들이 시온의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을 받음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11장에서도 여호와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불가능한 평화를 이룰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회복과 낙원은 결국 말씀으로 이루실 일이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씀으로 회복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리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여자의 후손이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는 종말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만물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성탄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이 종말적인 비전을 바라보며,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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