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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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나의 현장이 더 중요하듯, 나의 삶이 있다면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말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양심의 고통이 결국 나의 삶에 불만을 낳게 될 것입니다. 망령되이 말하지 않음의 복을 말한 것입니다. 말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책임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대하여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경건하게 침묵이 흐르는 제사개념인가? 한점의 먼지 같은 죄도 없이 정결한 의식인가? 주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신으로 만들고 우상으로 섬기는 대상을 만들어놓고 반복된 신의 이름을 노래로 기도로 바라봄의 존재로 만나는 날로 정한 것인가? 결국, 우상을 섬기는 자가 신을 만나 절하고, 경배하여 자신들의 만사형통하고 만 가지 복을 받을 수 있는 날인가?
그래서 정결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경건하게 앞에 찬란한 조명과 우리를 내려다보는 위엄 있는 교주 같은 분이 금세 지옥에 갈 것 같은 서슬이 시퍼런 재판장의 판결사항을 듣고 주섬주섬 모은 갖가지 헌금이란 명목으로 제물을 드려야 하는 날이 우리가 지켜야 할 주일이라고 하는 안식일인가?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적 자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없는 신을 신으로 섬기고, 신을 모양으로 만들어 우상이 되고, 그 모양의 이름을 지어 갖가지 섬기는 대상을 만나는 날로 변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까지 보시면,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는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로 일주일의 첫날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20:19, 행 20:7, 고전 16:2)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안식일이 언제냐? 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 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을 만나려고 가는 날이냐? 그날 신을 만나는 것이냐? 다시 말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냐? 입니다. 주일에만 하나님을 면회할 수 있는 날이냐? 이 질문은 아주 평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그날은 안식한다(멈추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다(출20:10, 23:12, 신 25:13~14). 어떤 짐도 옮기거나 짐승 위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느 13:15, 렘 17:21~22). 먹는 음식을 하루 전에 준비해야 한다. 안식일에 먹을 것은 그 전날 만나를 모아 둔다(출 16:5, 23~30).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사망이다(출 31:14~15).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란 사실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흥분하는 마음을 진정하고 주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9절을 보시면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절에서는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절에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였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와 안식일(安息日)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결국 “거룩히 지킬 것”이요,
“엿새 동안 힘써 일할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요,
“복되게 한 날”입니다.
거룩히 지킴에 대한 구차한 신학적 설명보다는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냥 불의와 부정에서 떠난 상태로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것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히 얽혀진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나눌 이유나 생각이 없는 상태,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의 상태로 모이기를 힘쓰고 나누기를 힘쓰고 기도에 전념하는 구별된 삶입니다.
거룩이란 의미가 하나님과 동떨어진 이방 신을 섬기는 그런 경건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바리새적인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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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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