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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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세례의 반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성경 본문은 첫째는 요한복음 20:19-23이고, 둘째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가속들이나 에베소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오순절 성령세례 때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이 복음으로 전하는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요한복음 본문에 이은 두 번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시어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본문의 사건을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그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방안에 들어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본문은 역사적으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해석은 대략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특히 오순절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요한의 오순절”(Johannine Pentecost)라고 지칭한다. 필자도 편의상 여기서 그렇게 부르고자 한다.
첫째는 두 오순절 이론이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사도행전 오순절은 같은 성령 세례인데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누가의 성령세례와 요한의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반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는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이나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레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이에 속한다. Finny 나 로이드 죤스와 등이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한 사람들이다. 요한복의 오순절에는 하늘로부터 온 소리나 불처럼 갈라진 혀가 임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 이외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방언도 없었고, 세례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뿐이다.
둘째는 모형론적인 해석이다. 요한의 오순절을 비유적으로, 혹은 모형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Ladd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기며,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사건을  “오순절에 성령의 실제적 오심에 대한 약속과 예상에 대한 실제적 비유”라고 말한다. 학자들 간에는 “숨을 내쉬다”라는 헬라어  “엠푸사오”와 창세기 2:7, 하나님의 사람 창조시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나파흐”() 사이의 의미상 유사성에 착안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서로 모형과 실형을 이루는 비유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실제적 사건이다.
셋째는 “요한의 오순절”을 이어지는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맛보기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즉 “요한의 오순절” 사건을 그리스도의 선물이 오순절에 완전히 주어지게 될 성령의 부분적인 수여로 보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성령은 제자들에게 그의 은혜와 함께 살짝 뿌려지듯이 주어진 것이지, 그 완전한 능력으로 제자들을 흠뻑 적신 것은 아니다.’라고 보았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이 그 본질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요한의 오순절”이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비적인 사건이라는 가르침은 결국은 두 번의 오순절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같은 한 사건을 각각의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요한은 부활과 성령세례,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서로 연합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부활 기간 어느 때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성령세례를 예수님의 부활과 묶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듯하다. 보체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의 의도가 당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변증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데 있어서 아들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람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요한의 오순절에 대한 해석을 종합해볼 때 이들의 해석과 주장은 본문에 대한 세심한 주석과 구속사적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정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제자들의 불신과 불안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는 상황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도 두려운 대상임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다. 그런데 21절에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다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이 얼마나 마음 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한 상태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두 번이나 이들의 평안을 주시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자신도 제자들은 보낸다는 사명의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셨다. 자세히 이 절의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숨을 내쉬었다 (Ind. aorist active 3ms, 부정과거형). 그리고 말씀하신다(현재형). ‘성령을 받으라.’” 이 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결코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쉰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시제가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은 헬라어 문법의 시제나 용례 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 요한 자신이 연이어 다른 시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의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의도는 분명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멈추었다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숨을 내 쉬셨을까? 어떤 사람은 “숨을 내 쉬다”는 의미의 헬라어 “에네퓌세센"이 창 2:7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창조의 개시를 선언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숨을 내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헬라어 “엠푸사오” 히브리어 대응어 “나파흐”()의 목적어로 “생명의 호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불어 넣은 것이 어떤 것인지, 어디에 불어 넣으셨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 없고, 단순히 숨을 내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 쉬었다는 말도 없고, 숨을 어디를 향하여 내 쉬었다는 방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여 제자들과 같이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숨이없으면 시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 부활한 살아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여기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위로부터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장대로 예수께서 이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셔서 새 사람들이 되었다면 8일 후에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집안에 있을 때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그의 손을 만지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시며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더구나 21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향에 내려가 물고기를 잡는 옛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이들이 새로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후퇴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소위 “요한의 오순절”은 누가의 오순절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나아가서 앞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해야 할 일로서 성령을 받아야 할 절차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개인의 구원이나 성화를 위한 것도 아니고, 반복될 일도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 의식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 세례를 받으며, 새 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위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며, 그는 선지자의 직임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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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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