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41. 기독교 구원관의 재정립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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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구원’이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원리는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구원론이 잘못되면 기독교 신앙 자체에 모순이 발생하여 나머지 모든 신조나 교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기독교의 올바른 구원관을 성경에 입각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교파들 가운데 왜곡된 구원관으로 성도들을 가르친 결과 성도들의 신앙관 자체가 정도(正道)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구원관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참 신앙인으로 성숙시킬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교인들은 그 행실이나 삶이 비신앙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교회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정론 구원관이란 무엇인가
예정론 구원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그의 구원론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형벌 받도록 예정되었다. … 예정된 자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교체시킬 수도 없다. … 이들은 넘어지거나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한기독교서회, 그리스도교 대사전, p757).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였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하나님은 각자의 장래를 정해 놓았다. 인간은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상동, p758). 이러한 칼빈의 주장에 대해 당시 종교개혁 관련 신학자로 활동하던 챤지(Girolamo Zanchi)는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선택된 자는 영을 상실할 수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갈 수도 없다”(상동, p.759)고 주장하였다.
예정론과 관련된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인간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 ②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지 멸망을 받은 것인지가 정해져 있다. ③ 구원을 받기로 결정된 자는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멸망으로 정해진 자들은 혹시 신앙을 시작해도 언젠가 타락하여 멸망 받게 된다.

예정론 구원관이 성서적인가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 이러한 예정된 구원론을 주장할 때에는 성경을 근거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5,1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러한 성경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선택하셔서 정해 놓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매우 주의하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은 그 해석이 다른 모든 성경절들과 조화를 이루고 상호간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성경절들도 많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돌이켜 나에게로 돌아오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내막적으로는 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그분의 존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공의’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중적 속성을 가진 분으로 오해할 여지도 남게 된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공정하게 대하시는 것은 숨길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당위성과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말이지, 그 주권으로 구원받을 자를 스스로 정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굳이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가 장차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더 성서적인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롬 8:29,30)다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원은 삶의 열매로 확인되는 것이다
예정 구원론에 관련된 성경절들은 대개 바울의 서신에서 인용된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글들을 보면 그의 구원관은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는 예정론과는 상관이 없음 깨닫게 된다. 바울이 회심한 후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을 살며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이 성경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이 자신의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은 바울도, 끊임없이 전도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매우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연습하라”(딤전 4:7)고 하였고, 자신도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15:31). 베드로도 얻은 구원을 놓치고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고 표현하였다.
 예정 구원론은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의 삶에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구원이 예정된 자들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도 결국에 가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현재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열매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이 비신자와 구별되지 않는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는 말씀이 실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므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평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게 된다. 옥토에 뿌려진 좋은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이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후의 모든 삶이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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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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