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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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은 아련한 옛 모습이다. 굴렁쇠를 굴리며 달렸던 신작로와 열매를 따러 부지런히 오르내렸던 팽나무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수면위로 동네정경을 찬찬히 끄집어 올려 보려는 순간 동구 밖 팽나무가 제일 먼저 다가선다. 우람한 모양새의 오래된 팽나무는 가지들이 사방으로 잘 뻗어있어, 여름이면 그늘이 좋았고 팥알 만 한 초록 열매가 잔득 열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애들과 전쟁놀이를 하느라 시누대로 만든 딱총의 실탄이 되는 열매를 따려고 나는 팽나무에 노상 붙어살았다. 아이들을 위해 늘러진 한쪽 가지에 작은 그네가 메어 있었지만 팽나무 가까이에 사는 천 씨 네의 늙은 숫염소가 훼방꾼이었다. 염소를 무서워하는 누이동생을 위해 나는 그놈과 싸워야 했다. 뿔에 받히지 않을만한 안전거리에서 딱총을 쏘아대고 침을 뱉은 후에 그래도 용을 쓰는 놈을 작대기로 때려 물리쳤다.
봄 부터 가을까지 팽나무 아래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밭일하러 온 여인네들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점심때면 왁자지껄하다가 따라온 여자애들이 아기를 업고 비켜나면 조용해졌다. 잠간씩 오수를 즐기다가 금방 젖을 물렸던 하얀 젖무덤이 드러난 채로가 보통이었다. 엄마들이 밭으로 나가면 팽나무는 온통 우리들 차지가 됐다. 여자애들은 아기를 그늘에 눕혀놓고 그네를 타고. 남자애들은 다른 쪽 가지에 올라 열매를 따면서 자동차 달리는 시늉을 내느라 부르릉부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밑에 있는 가지를 발로 굴러댔다. 나는 위로 잡은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나가떨어져 이마와 머리를 다쳐 피를 흘렸지만 그런 게 일상이었다.
우리 마을은 강 상류의 동쪽에 있다 해서 강동江東이 지만 팽나무 동네로 통했다. 팽나무가 정자나무인 동네는 강동뿐이라 다른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면소재지인 송정리에 속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만 모여 사는 이방인 촌이었다. 물 건너 공수평 마을은 둘째 고모님 댁을 중심으로 한 장 씨들이 반듯하게 살고 있어 우리 마을과는 격이 달랐다. 우리 동네보다 배나 크고 느티나무가 정자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고 그네를 못했다. 그래서 여자나 아이들이 쉴만한 장소가 아닌 듯 할아버지들 차지였다. 윗동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팽나무에 오르며 놀다가기를 좋아했다. 그 중에는 동산리에 사는 같은 반 고재봉(후일 남다르게 알려진 분)이 끼었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성씨가 각각 달랐다. 팽나무 정자를 기준으로 웃 강동 아래 강동이라고 불렀다. 아래쪽에는 영암 댁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을 포함해 일곱 집이 살았다. 바닷가 강진에서 왔다는 강진 댁, 더 멀리 안동에서 왔다는 안동 댁과 하동 댁 등 모두가 타관사람들이라 대대로 마을 어른들이 주관하여 행사를 치루는 이웃 동네로부터 하대를 받기도 했다. 위쪽에 사는 네 가구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앞에는 숯과 장작을 실러 오는 일제 목탄차가 덜컹대며 지나다녔다. 커브를 돌아 냇물을 건너려고 주춤 거릴 때 나는 뒤에 메어 달려가다가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조수에게 붙잡혀 얻어맞으면서도 재미가 있어 그 짓을 계속했다.
우리 동네에서 더 깊은 산속의 골짜기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다. 숯을 굽고 화전을 일궈 붉은 감자와 콩, 팥, 수수 등을 경작하고 있었다. 장날이면 숯과 감자 등의 잡곡을 한 짐씩 메고 이고 나와 소금과 젓갈 등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팽나무 아래서 쉬었다가곤 했다.
그들 중 한 가정이 공비소탕 때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와서 한동안 같이 지냈었다. 상당히 배운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정든 고향을 떠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게 된 사정을 우리에게만 알려주었다. 그해 겨울엔 상황이 바뀌는 통에 토벌대에게 쫓겨 우리가 그곳으로 십여 일간 피난을 간적도 있었다.
건너편 공수평 뒷산 너머의 깊은 골짜기 엉골에는 곰과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그 초입에 외가 문 씨들의 제각과 관리하는 집이 몇 채있는 노루목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강동으로 이사를 하기 전에 한겨울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 때 불교의 선종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제일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 곳이 봉덕리 가지산이었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 아래로 흐르는 냇물을 막아 보림사라는 절을 세우려할 때였다. 깊은 물에 살고 있던 용이 쫓겨나면서 가로 막힌 바위산을 처서 생겼다는 용소龍沼 앞에 있는 용문리라는 큰 마을이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꼬리를 다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 해서 생긴 피재를 넘으면 장흥군 장평면이다. 장흥읍내와 보성군 벌교로 가는 길목인데 해방 전에는 산적들이 진을 쳤고,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출몰하는 통에 함부로 통행이 어려운 비상지대였다.
우리 동네 앞에는 어설프게 만든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진 채로였다. 우마차가 그냥 물길로 어렵게 다녔고 물속에 잠긴 다리는 물고기들의 서식처가 됐다. 동네 애들과 고기도 잡고 돌출된 부분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위쪽에 있는 보의 물이 수로를 따라 동네 앞으로 흘러 팽나무 옆 실개천과 합쳐지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도록 놓인 작은 다리 밑에는 수초가 우거져 있어 붕어와 새우, 징거미가 바글댔다. 형을 따라 바구니로 그것들을 훌쳐 잡아가면 어머니는 햇감자를 넣어 조림을 맛있게 해주어 물고기 잡는데도 열심이었다. 팽나무 열매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는 딱총놀이를 접어두고 군것질 서리를 하느라 열중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또래 용석이와 곤식이를 불어냈다. 팽나무 아래에서 서리한 고구마와 풋콩에 옆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먹느라 누가 어찌된다 해도 모른다 할 지경이었다.
산에는 동삼動蔘이 라는 오래된 산삼이 있어 산신령이 점지해준 사람들만이 캔다고 했다. 산나물과 약초는 물론 여우, 오소리, 산돼지, 노루가 자주 보였고, 늑대와 곰 호랑이를 봤다는 이들의 이야기 재미있었다. 마을 앞 냇물에는 메기, 쏘가리, 모래무지와 은어가 흔했고 자갈처럼 깔린 게 다슬기였다. 일대의 군주 같은 외할아버지가 문중 일로 나타시면 전답과 선산을 관리하는 둘째외삼촌댁과 우리 집엔 비상이 걸렸다. 누나와 나는 다슬기를 잡아오고 어머니는 국을 끓여서 외할아버지께 바쳐 드렸다. 외삼촌이 그간의 보고를 하느라 야단을 맞으며 진땀을 빼는 게 당연지사 인 듯싶었다. 나는 외할아버지께 불려가 용돈을 받고 대가로 다리를 질근질근 밟아 드렸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빨치산 토벌이 마무리 되고 정전이 되었던 다음해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떠나가 살게 되었다.
팽나무 동네를 정점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던 행적의 그림들이 나를 붙잡는다. 해방이 되던 이듬해 봄부터 시작된 밤사람(야산대)들, 여순 반란군 잔당들, 인민군 패잔병들이 합쳐진 빨치산들 속에서 겪어낸 시간들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간 태어난 일본 고베를 두 번이나 찾아가 봤고 또 찾아 갈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유소년시절을 유별나게 보내야 했던 곳을 찾아 볼 수 없음에 허탈감이 든다. 그래도 기억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들 때문에 해마다 한 두 번은 파란 물만 차 있는 현장을 찾는다. 물방울 같은 편린들을 모으려고 타임머신도 타고 노루처럼 달리며 솔개처럼 살피게 된다. 어쨌든 그 시절을 진솔하게 기술記述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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