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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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의 서론에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장엄한 팡파례가 울리는 데 이어 이를 증언하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 안드레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그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신 계시의 말씀과 말씀대로 성령이 예수님위에 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그의 제자 안드레는 스승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그의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물세례를 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설명을 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풀을 뜯는 양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면 이 경우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양이라는 의미가 가능하겠지만 사람을 가리켜 양이라고 말한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식용이나 성전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는 동물이다. 양은 사람들의 부를 가늠하는 척도도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빈부를 가늠하는 상황도 아니다. 세례 요한은 이 양에 한 마디 부가 설명하는 말이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죄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사용하는 속죄양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위한 속죄물로 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생각이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제물로 신에게 바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시고 금하는 일이다. 여기서 세상 죄라는 말은 어느 한 개인의 죄를 위한 속죄물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양이라는 표현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아무에게나 사람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세상 죄를 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는 세상사람 모두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세상사람 모두가 죄인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지고 가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을 어떻게 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점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곧 왕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대왕께 불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물론 그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담은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초래한 자였다. 결국 아담과의 그의 통치권 아래 있어서 어담과 연대성을 형성한 모든 만물은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심판 아래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아담이 망쳐놓은 세상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함께 다 쓸어버려야 존재들이다.
이 세상을 살리려면 누군가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값을 지불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의 언약적 통치권 아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대표자로서 죄 값을 치를 자격이 없다. 죄인이 자기 죄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새아담으로 세워 그를  통한 대속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죄인들에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로부터 교육을 시작하신 것이다. 어린 양을 잡아 대속의 의미를 보여주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 때 까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워 새아담의 정체와  새아담을 통한 대속 방법을 교육하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만들어 모형 훈련을 실시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대속 사역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이 바로 새아담, 새언약의 대표자로서 자기 몸을 옛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세상의 모든 죄, 모든 죄인들을 살라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죄 값으로 바칠 제물이라는 의미로 쓴 표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의 죄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새아담의 속죄자 역할을 머리에 두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한다(1:34).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물 많은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선지자였다.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길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왕의 행렬이 지나가기를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는 지나가는 예수님에 대해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의 하나가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에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이다.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며, “기름부음을 받은자”(the one who has been anointed)라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대제사장이 새로운 왕이나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손으로 머리에 안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 인정하셨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같은 왕(메시야)을  보내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 하룻밤을 그와 함께 머물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이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감히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는 그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
안드레와 그의 친구는 그의 선생,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랍비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알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거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라. 그러면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하룻밤 동안 그의 거처에서 머물렀다. 우리는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안드레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처를 물었고,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처를 물었지만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자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과의 하룻밤이 안드레가 메시야임을 깨닫게 한 것이다. 하룻밤 동안의 예수님과 함께 함, 예수님과의 동거, 예수님과의 교제,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안드레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난히 관계 문제를 많이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주제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이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며 시작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자 인간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밤을 보내셨다. 그분께서 머물고 계신 곳에 이 두 사람이 머물렀다고 했다. 여기서 “머물다”는 말은 헬라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하신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이 “내 안에 있어라”라는 말이다. 한글은 “내 안에 있어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내 안에 머물러라”이다 (15:1-8). 똑같이 “메노”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한 최후 기도를 하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계속 그 안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17:21).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 “머물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시기까지 “머물다”라는 말로 끝났으며, 복음서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머문 기록이다.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성도들 안에 성령으로 “메노”, “거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그와 함께 머물렀다”는 말은 새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안드레가 만난 예수님은 “왕”이었다. 엣 아담이 왕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듯이, 새 아담도 새로운 왕으로 오셔서 아담을 대신한 새통치자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새로 모으시려는 것이었다. 옛 아담에 안에 있던 자들은 이제 새 아담에게 와서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새 아담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는 옛 아담과의 연대성으로부터 풀려 나와 새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들어와 새 왕과 연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아담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내 안에 있어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좋은 일, 희생 봉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은 항상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지, 새언약의 연대성이라는 관계성을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안드레에게 단순하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시고 그 밤을 함께 보내셨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 새언약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두머리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왔다. 그리고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삼년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안드레에게 들었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같은 대답을 하고 이에 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데,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안드레의 선생,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의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가진 후 내린 예수님에 대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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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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