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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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답지 않게, 아니 나이 탓인지 모르겠으나, 새해 들면서 니체를 자주 들쳐보게 된다. 그냥 닥치는 대로 폈다가 접기를 되풀이 하면서 이곳저곳 밑줄을 긋다 보니 <차라투스트라>한 권을 다 읽은 것 같다. 그렇다고 컬컬한 속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을, 그래서 쉬 책꽂이에 되돌릴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 터에, 어쩌자고 다시 꺼내들었던가 하고, 경솔했던 처신에 혀를 차보지만, 그래도 꺼내 들기를 잘했다며 위로해본다. <차라투스트라> 2부에서 <타란툴라(독거미)에 대해서>와 3부 <스쳐 지나감에 대해서>를 중심으로 해서, 두서없이 몇 구절을 간추려보기로 한다.  
“보라, 이것이 타란툴라(독거미)가 사는 구멍이다! 저기 타란툴라가 스스로 기어 나오는구나…. 그대의 영혼에는 복수심이 숨어있다. 그대가 물면 어디든 검은 부스럼이 자란다. 그대의 독은 복수심으로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그대들에게 나는 비유로써 말한다. 그대들은 타란툴라(독거미)이며 몸을 숨긴 채 복수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다….그대들의 정의라는 말의 뒤편에서 그대들의 복수심이 튀어나오리라.”
“인간을 복수심으로 부터 구해내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교량이고,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 그러나 물론 타란툴라는 다른 것을 원한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우리들의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정의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믿지 마라! 참으로 그들의 영혼에 결핍된 것은 꿀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착하고 의로운 자임을 자칭할 때, 잊지 말라.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는데 모자라는 것은 다만 권력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로 우연히 행운을 잡았을 때,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사람을. 그럴 경우 자신이 혹 부정한 내기를 한 것이 아닌지 하고 의심해보는  사람을.”
언젠가 차라투스트라가 큰 도시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민중이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라 부르고 있는 바보를 만난다. 바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어조를 흉내 내고 그의 지혜를 꾸어서 연설하기를 즐겼다.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연설하는 것으로 착각하리만큼 빼어 닮은 발상과 말씨로 현대 문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한다. “당신은 영혼들이 더러운 누더기처럼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이 누더기로 신문도 만들지요!…….그들은 모두 병약한 자들이며 여론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하는 바보의 말을 제지하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개구리와 두꺼비가 되어야만 할 만큼 오랫동안 늪가에 살았더란 말인가?.....“나는 너의 그런 경멸을 경멸한다.”
“거품을 품고 있는 바보여, 세상 사람들은 그대를 나의 원숭이라 부르고 있다지만, 나는 그대를 나의 투덜대는 돼지라고 부르리라…. 그대를 투덜대게 만든 것은 누구였던가? 아무도 그대에게 충분히 알랑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대는 그처럼 요란하게 투덜댈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이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경멸을 단지 “사랑 안에서 날아가게 하려고 하고 있다…. 입에 거품을 문 돼지여”
“나는 그대를 알고 있다. 그대는 덜된 무리를 비판하며 바쁜 척 하고 있지만,  욕설은 그대에게 있어 쾌락이다. 쉼 없이 뭔가에 대해서 복수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그대는 허영심에 쫓기고 있는 데 불과하다. 설사 그대의 말이 그럴듯하게 이치가 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나 바보여, 이별하는 마당에 그대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사람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곳을 지나쳐 버려야 하는 것을 ”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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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라투스트라...’를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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