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비로소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아

처음에 하나였던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분파를 만들어내었다. 크게 로마 가톨릭, 희랍 정교, 프로테스탄트로 구분하나, 실상은 이 외에도 각 나라와 민족에 따라 이 세 그룹에 속하지 않은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엡 4:4-6)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이처럼 많은 분파를 만들게 된 과정을 살펴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
그리스도교는 사도 시대로부터 속사도 시대 그리고 교부 시대를 지나기까지 처음 3세기는 로마 제국의 박해아래 있었다. 이 박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기나긴 참극이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겉으로는 가난하고 비천해 보였으나 실상은 하늘의 은혜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품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라는 말씀대로 순교자들의 피를 딛고서 인내 속에서 견뎠다. 은과 금은 없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3:6).
이 기간동안 교부들의 신학은 주로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적 이교(異敎) 사상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하고, 영지주의(gnosis) 이단을 논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변증과 논박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거대한 힘과 활력으로 신앙의 신적 기원과 특성을 도출해 냈다.

1)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처음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반란 가능성이 있는 혁신집단으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는 제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들이 점령한 각 지방의 풍속, 종족들의 법, 종교적 신앙, 백성들의 정치제도를 인정해 주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불법적 종교’(religio illicita)가 된 이유는 유대사회의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였던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는 황제숭배를 반대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그가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상관없이 신(神)으로써 제국의 번영과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법(法)을 구현하는 존재로 추대되었다. 황제숭배의 깊은 뜻은 단순히 황제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경배였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권력과 제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고발되었다.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주후 64년 네로(Nero) 황제로부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는 제국의 모든 속주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의 감독(주교), 사제(신부), 부제(집사)는 즉결 처형하고, 귀족이나 귀부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노동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죄명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행위였다.
주후 300년 2월 24일 로마제국 전역에 공표된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은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모두 토대부터 파괴한다. 교회로 쓰인 곳이 개인주택의 일부라 해도 예외가 없다.
②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교도들의 모임은 엄금한다. 예배도, 세례식도, 결혼식도, 장례식도 이 금령에 적용된다.
③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서적, 예배에 쓰이는 기구, 십자가, 그리스도상 등은 몰수하여 소각한다.
④ 그리스도교도는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자라도 모든 특권을 박탈한다.
⑤ 그리스도교도로 인정된 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비롯하여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
⑥ 교회의 재산은 몰수하여 경매에 붙이고, 매상금은 지방자치단체나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직능조합에 분배한다.
⑦ 그리스도교의 신도로 인정된 자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한다.

2)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로마는 지중해를 끼고 동서남북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다보니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선 국경 침입과 군대의 반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해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로 구성된 4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가장 극렬히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였다.
동방의 정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수도를 니고메디아(Nicomedia)로 정하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북아프리카를 방위했다. 부제는 갈레리우스(Galerius)로, 수도는 시르미움(Sirmium)으로 정하고, 북쪽은 도나우 강, 남쪽은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 전역을 방위했다.
서방의 정제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수도를 밀라노(Milano)로 정하고, 도나우 강 상류 일대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지중해 섬, 북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방위했다. 부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로, 수도는 트리어(Trier)로 정하고,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히스파니아, 북서 아프리카를 방위했다.
주후 305년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동반 퇴위하고, 동방 정제는 갈레리우스가 되고, 부제는 막시미아누스 다자(Maximianus Daza)가 되었다. 그리고 서방 정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되고, 부제는 세비루스(Sebilus)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자 부제인 세비루스는 밀려나고, 서방 정제에는 니키니우스(Licinius)가 되고, 부제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아버지가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며 황제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4명의 황제는 막센티우스를 국가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북쪽에 있는 티베르 강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아우스를 무찔렀다. 이 전투가 있기 전날 밤 꿈에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상징이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교를 관용하라.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다”라는 내용의 역사적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가 박해에서 해방된 ‘밀라노 칙령’이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발령된 그리스도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 받는다. 그리스도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된다.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도들에게서 몰수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에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3)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자유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4개의 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째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교구이고, 둘째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구이며, 셋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이고, 넷째는 이탈리아의 로마 교구이다. 그리스도교가 박해 아래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구마다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즉 기독론이 통일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원론의 영지주의(gnosis)는 예수를 신의 현현, 즉 ‘그리스도’(메시야)로 보면서도 사도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는 진정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영(靈)이므로 육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리우스(Arius)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창조주 성부의 신성과 달라 성부로부터 맨 처음 난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성육신 신앙에 위배된다는 것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여론은 지역에 따라 갈라져 있었다.
이를 통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4개 교구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소아시아 니케아에 불러모았다. 그것을 제1차 세계그리스도교공의회라 한다. 그 이전에도 각 교구나 관구(속주) 또는 전국 및 총대교구 단위의 지역 공의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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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춘오 목사(발행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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