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LeeSunKyu.jpg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고백이 있었고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큰 기쁨과 감격이 그들 안에 넘쳐났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아직 제사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고 제사장도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 드리는 제사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가 충만한 예배였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의로움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믿으므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의롭지 못한 나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십니까? 이렇게 좋으시고 고마우신 분임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15: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가지고 먼데로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돼지를 치는 집에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자녀의 권리를 회복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엄청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어진다.
우리에게 감사 할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구원에 대하여 발견하는 일 보다도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사건이야 말로 감사할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깨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소위 지상의 모든 신보다 크시다는 사실이 입증 되었다.
이스라엘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점차로 바로왕의 혹독한 감독 밑에서 배운 오랜 습관이 그들에게 나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혹독한 곤경에서 구하셨다는 감격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이 감격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이드로는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의 직업이 바로 제사장 아닌가?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바로알고 제사 드렸을 때 그 제사는 그가 처음으로 드린 바른 제사요. 살아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께 받으신 제사였다.
하나님을 발견 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된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 그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고 그분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때 그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일치하는 예배, 이드로는 예배를 드린 후 번제물과 희생을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말하는 하나님 앞이 어디인가? 저는 구름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기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 했다. 예배는 곧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절제된 사랑을 볼 수 있다. 둘이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절제 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큰 싸움이 있은 후에 지쳐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만남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으며 또 얼마나 세속에 물들여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더 알게 될 것이고 놀라운 확신가운데 서게 될 것이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만남의 축복(출 18:9~27)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