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054년, 서방 ‘로마 가톨릭’과 동방 ‘그리스 정교회’로 분파

그리스도교의 대분열
그리스도교는 주후 3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불렀다. 이때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류라는 말만큼 범위가 광범위한 말이다. 이 보편적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종이나 자주자나, 주인이나 머슴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다.
빌립보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라고 했다.
또 에베소서는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0~23)라고 한다.

1.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회론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은 이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를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밀리탄스(Ecclesia militans)이고, 둘째는 죽은 자들이 ‘연옥에서 잠자는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도르미엔스(Ecclesia dormiens)이며, 셋째는 천상의 ‘승리의 교회’로서 에클레시아 트라움판스(Ecclesia traumfans)이다. 그러나 중세 종교개혁자들은 연옥에서 잠자는 자들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의 교회에 편입시켰다. 즉 가톨릭(보편적)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를 관장하는 우주적 교회라는 뜻이다.
당시 로마 판도 안에 있던 그리스도교는 5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순서대로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수리아 안디옥,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이탈리아의 로마 교구가 먼저 생기고, 이어 4세기 초에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생겼다. 이 중에 예루살렘과 안디옥,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에 속하고,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구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에 속했다. 교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는 이 5대 교구의 대표자들이 참여해야 보편공의회로 인정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공의회에 지나지 않게 된다.

2. 로마 교구의 수위권 주장과 ‘필리오케’ 논쟁
그런데 6세기에 이르러 로마 교구가 수위권(首位權)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교구는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가 세웠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590년 로마 대감독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에 등극하면서, 세계교회의 모든 감독 가운데 제1의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황제를 모시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자연히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에 분쟁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교구가 교황의 이름으로 수위권을 주장하고 다른 교구에 간섭하려 하자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작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골을 더 깊게 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성령발출설’(필리오케) 문제가 그것이다.
325년 니케아 신조는 성령론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생기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고 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고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끝난 후 서방 교회가 돌아가서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일방적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라고 고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라틴어 ‘…으로부터’라는 단어인 “필리오케(Fillioque) 논쟁”이라고 한다. 분명히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은 “성부로부터…”라고 했는데, 서방 교회가 “성부와 성자로부터…”라고 변조했다는 것이다.
동방 교회는 회의 때마다 서방 교회에 시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끝내 수백년 동안 갈등을 빚어오던 이 필리오케 논쟁은 1054년에 동·서 교회가 갈라지는 명분이 되었다.
이때는 613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모하마드의 이슬람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과 수리아 안디옥,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이슬람에 점령당한 후였다. 이 세 교구는 총대주교좌가 유지되고는 있었으나 교세는 현저히 축소된 상태였다.
시리아는 636년에, 이집트는 642년에, 북아프리카는 670년에, 카르타고는 698년에 각각 이슬람화 되었다.

3. 가톨릭의 분열
거룩한 가톨릭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결정적인 원인은 1053년 동방 교회 총대감독(총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우스(Michael Kerularius)가 비잔틴 제국 내 로마교회의 수도원을 폐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1054년 초 로마 교황 레오 9세(Reo 9)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케롤라리우스에게 세 명의 사절단을 보냈다. 훔베르트 추기경, 프레드리크 추기경, 페트루스 대주교가 그들이었다.
1054년 4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사절단은 총대주교 앞에서 자신들이 푸대접을 받았다며 불평했다. 게롤라리우스가 그들이 들고 온 교회의 서신을 받아보니 봉투가 뜯긴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신이 중간에 변조되었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불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한지 얼마 후 로마 교황 레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은 교황 레오의 사절단이었으므로 자신들을 파송한 교황이 죽어 그 권한이 사라진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7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콘스탄티노플 성직자들이 성찬식을 위해 소피아 대성당에 모여있는 가운데 로마 사절단은 정식 대주교복과 추기경복을 갖춰 입고 소피아 대성당에 나타나 주제단 위에 총대주교 케롤라리우스에 대한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파문장을 엄숙히 올려놓고, 게롤라리우스가 이단자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발에 먼지를 털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총대주교는 파문장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로마 사절단을 공식적으로 파문한 후에야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이로써 사도 시대 이후 ‘가톨릭’이란 이름아래 유지해 오던 그리스도교는 크게 두 교회로 갈라졌다. 로마 교구를 중심한 서방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되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중심한 동방 교회는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가 되었다.

4. 동·서 교회는 왜 분열했나?
동·서 교회의 분열의 배경에는 서로 다른 언어·문화·관습의 문제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언어의 상이성은 정신적 문화적 상호 이해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신학 용어에서도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서방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고, 동방 교회 지도자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상호교류는 언제나 통역관에 의지해야 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은 그리스인들은 라틴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음험하게 비쳤고, 라틴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무식하고 야만스럽게 보였다.
또 서로 다른 관습도 문제였다. 그로 인해 신학, 예배, 교회법, 제도, 조직 등 교회의 관습들이 따로 발전해 갔다.
하나의 보편적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거룩한 가톨릭’(the holy catholic)은 소(小)문자 가톨릭(catholic)으로 표시되고, 거룩한 가톨릭에서 분파된 하나의 교파로서의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은 대(大)문자 가톨릭(Catholic)으로 표시해 그 차이를 나타낸다.
1054년 교회가 동·서로 갈라진 후 서방교회는 1095년부터 1207년까지 175여년 간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수행했고, 동방 교회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 당하므로써 동로마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고, 총대주교좌를 잃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동·서로 갈라진 결과이다. 오스만 제국 내에 있는 동방 교회의 재산은 몰수 당했으며,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1517년 독일에서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촉발된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신교(新敎)가 생겨났는데, 이는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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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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