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땅의 입

배 정 순

비 오는 날 밭에 나가면
땅의 입이 보인다.

떨어지는 빗방울들
쪽쪽 받아 마시는
땅의 입이 보인다.

호박잎이 세수하고 난 빗물도
오이가 먹다 흘린 빗물도
남김없이 받아 먹는 땅의 입.

비 오는 날
오이랑 호박 따러 갔다가
땅의 입 밟는 게 미안해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었다.

땅을 밟는 것도 미안해하는 동심의 시심이 놀라운 감탄을 불러준다. 조금씩 병들어가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암울할 것 같은 미래를 염려하지만, 시의 전문은 자연을 곧 우리와 함께 사는 생명체임을 귀띔해 주고 있다.
한겨울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은 푸석 푸석 하고 봄을 기다리는 나무와 풀들도 지쳐 있는 듯 삭막한 들판과 산들이 적막하지만, 곧 땅은 큰 입을 열고 물을 벌컥 벌컥 마시리라, 아 -하  땅도 입이 있구나, 시인은 땅의 입을 보았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듣고 있고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된다. 커다란 입으로 빗물을 마시고 온갖 생명들을 그 품에서 보듬고 키우고 있다. 호박잎이 세수한 물도 오이가 먹다 흘린 물도 소중하게 받아 먹는 땅, 촉촉한 흙을 뚫고 봄의 생명들이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성경에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대로 땅은 호흡하고 빗물을 마시고 백설기 같은 흰눈을 먹고 떨어진 꽃잎과 나뭇가지와 이파리도 포근히 품어 새 생명을 만들 흙으로 갈무리 한다.
해마다 어린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게 하고, 고물고물 개미들은 성을 쌓게 하고 다람쥐는 땅의 품에 도토리를 묻어 두는 것을 지켜보며 땅은 큰 입으로 웃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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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땅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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