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1
2019/08/01 10:34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영혼의 쉼을 주시는 예수님(마 11:28-30)
1-1.jpg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6일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활동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는 신이다. 뿐만 아니라 제7일에는 그가 만드신 사람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에게 쉼을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동과 안식과 결혼을 창조시에 사람이 지켜야 할 규정으로 세우셨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규정 (Creation Ordinance)라고 칭한다. 사람은 일해야 할 존재이고, 일을 하면 쉬어야 하는 존재이고,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남녀노소, 종족과 나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피조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쉴만한 여유가 없다. 눈코 뜰 시간이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진정한 쉼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쉼이란 노동을 전제한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 쉼이 필요할 리가 없다. 사람은 창조시부터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반역한 후에는 전보다 더욱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 3장 17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는 “네 얼굴에 땀을 흘려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부연하여 말씀하신다.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수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이차본”()을 번역한 것인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내린 저주의 말씀 가운데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의 “고통”이라는 말과 같다. NET 나 NIV 에서는 “painful toil” (아픈, 혹은 괴로운 수고,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번역했고, KJV에서는 “슬픔 가운데”(in sorrow) 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는 잉태하고 출산하는 고통을, 남자에게는 땀 흘려 일하는 고통을 주신 것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생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노동이 괴롭고 아프고 슬픈 것이 되었다. 죄로 말미암은 인생살이가 고통스럽고 슬프고 힘든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피곤하고 병들게 되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보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이 있다. 내가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할 수 없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내 양심을 괴롭히기 때문에, 심령이 메말라 가 마음에 평안이 없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찬송가는 울리는 꾕가리 소리 같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일이 나를 오히려 피곤하게 한다. 영적인 탈진 상태에 빠지게 한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과 사활을 건 전투를 마친 엘리야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죽음을 청하는 것처럼 맥이 빠져버린다. 우리 인생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곤한 존재들이다. 전도서 1:8에는 솔로몬은 만물이 피곤한 것을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솔론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1:1). 또 2장 23절에는 평생을 수고하여도 근심과 고통 뿐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인생이 헛되다고 말한다. 모든 만물에게 쉼이 필요한 세상이다. .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피곤한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시고, 새로운 힘, energy를 충전시켜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쉼을 주신다.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안식하라고 명하신다(출 20:9-11).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먼저 쉬셨듯이 7일 째 안식일에는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쉬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다. 안식일에는 아예 만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양식 창고의 문을 닫으시고, 식당문도 닫은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듯이 우리 사람들도 우리의 생업으로부터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리적으로 먹고, 일하고, 잠 자고, 쉬는 사이클을 가진 생명체로 창조하셨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력이 재충전되고, 새 힘을 가지고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느라고 밥을 제 때에 못 먹는 사람, UTube 보며 밤새거나 일이 많아 잠을 못자는 사람, 다 하나님이 만드신 life cycle을 자기 좋을 대로 조작해서 결국은 자신을 망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강철이 아니고,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software가 아니다. 가장 쉽게 망가지기 쉬운 유기체이다. 한번 뇌세포에 변형이 일어나면 회복이 쉽지 않고 결국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일에 빠져서는 안 되고, “중지”할 줄을 알아야 하고, 쉴 줄을 알아야 한다.
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신다. 예수깨서는 우리 인생들을 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로 부르신다. 우리는 고통스럽게 일하고 무거운 죄짐을 진 자들이다. 사람이란 다 지겟꾼이다. 빵의 짐과 죄의 짐을 지고 힘겹고 고통스럽게 나그네 길을 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빵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없고, 한 번 지게 된 죄의 짐은 내려놓을 길이 없어 발버둥을 친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지겟 짐을 져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는 것이다. 멍에는 농부들이 논밭을 갈 때나 달구지를 사용할 때, 소들의 목에 메는 막대기나 기구이다. 우리나라의 쟁기나 수레와는 달리 근동이나 동남아세아 지역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매고 함께 쟁기질을 하거나 수레를 끌게 한다. 두 마리의 소를 한 멍에로 함께 목을 메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떨어질 수 없다. 함께 서고,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멍에는 서로 뗄 수 없는 연대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멍에”라는 말은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치나 제도들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다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의 죄를 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수, 아담의 가죽 죄수복을 입고, 아담과 함께 죄의 멍에를 지고, 비틀거리며 가는 농부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 받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지워진 멍에, 곧 연대성 때문이다. 아담과 함께 아담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곧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짐은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고 버벅대고, 허우적거리며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께서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짐을 지고 바둥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 아담, 예수님을 세워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게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그에게 넘겨씌우셨다”고 했다. 또한 11절에는 “그가 자기 영혼을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할 것이니, 내 의로운 종이 그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며, 또 그들의 죄를 친히 짊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 짐을 지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셨다. 그 새 아담이 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그의 멍에는 그가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짐이 아니다. 그의 멍에는 우리를 그와 함께 메는 띠, 곧 band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멍에를 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쉬고,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이 예수께 묶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쟁기질을 하고 함께 달구지를 끌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멍에, 곧 옛 아담의 멍에와 새 아담의 멍에를 동시에 멜 수 없다. 그동안 메고 있던 아담의 멍에를 벗어야 새 아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를 멜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있던 빵의 짐과 죄의 짐을 끄는 옛 아담의 멍에를 벗겨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형수 아담에게 입히셨던 가죽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시고, 편하고 쉬운 예수님의 멍에를 우리가 함께 메게 하셔서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므로 예수님과 함께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pnnews@empas.com
교회연합신문(www.ecumenicalpress.co.kr) -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화제의 포토

화제의 포토더보기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교회연합신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  |  발행인 : 강춘오  |  설립일:1991년 11월 16일
    | 사업자:206-19-64905  | 03127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16길 73-10  |  대표전화 : 02-747-1490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All right reserved.
    교회연합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