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대 정인기 장로, 2대 규만, 3대 영현·두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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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남산동에 웅장한 모습의 석조 예배당이 있다. 유럽의 오래된 예배당을 연상케 하는 석조건물은 우리나라 교회당 건축의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
대구서현교회가 바로 이 교회이다. 이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가정이 있으니 바로 정규만 장로 가정이다. 3대 장로 가정인 이 가정의 미담은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1대 정인기 장로의 헌신
정인기 장로는 형님 정인백 영수와 함께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았고, 구미 상모교회의 기둥으로 헌신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다니기 쉽게 대구로 이주하여 서현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그러니 아들보다 늦게 장로가 되었다.
양부 정인백의 신앙심을 전승받은 정규만 장로는 23세 때에 결혼한 배필을 통하여 믿음과 능력이 배가되었다. 부인 김영숙 권사는 정규만 장로에게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출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평생 성수주일과 구제와 전도, 성경말씀 읽기와 기도, 헌신과 겸손을 목표로 주님께 약속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그 정신이 그대로 자녀에게 이어지기를 원했으며, 자녀의 학업 성적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루에 성경 말씀을 몇 절 읽고 기도를 몇 번 했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독려했다.
정규만 장로는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약전골목 내의 활신한의원과 접해 있는 한옥에 거주하였는데, 대지가 360평에 방이 열네 개나 되고, 연못이 있는 넓은 집이었다. 대구를 방문하거나 그를 찾아온 목회자와 신학생 및 교인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집을 개방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집안은 항상 북적거렸고, 그들을 위해 서너 명의 가정부가 있었는데 늘 시장에 가서 식재를 사는 일이 일과였다. 김 권사는 인근에 있는 염매시장에 단골로 갔는데 그녀가 오면 상인들은 비싼 값을 불렀지만 절대로 가격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지급했다. 같이 간 가정부들이 불평하자 “그들도 이익이 있어야 운영을 하고 또 그래야 우리에게 좋은 음식재료를 주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해방 전후로 우리 사회가 극도로 가난하여 거리에는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걸인이 많았는데 여염집에서는 문전박대하거나 아니면 상하고 식은 밥을 던지듯이 주었는데, 정 장로 집에서는 일일이 그들에게 상을 차려 주어 마루에 앉아 따뜻한 식사를 하도록 잘 대접해 주었다. 하루 평균 10˜20명 정도의 걸인들이 소문을 듣고 걸어왔으나 한 사람도 푸대접하여 보내지 않았다. 한번은 안동댁이라는 가정부가 공손치 않은 걸인과 말다툼을 하면서 “주인과 손님들 섬기기도 피곤한데 너 같은 거지까지 내가 섬겨야 하느냐? 오늘 줄 밥이 없으니 빨리 나가거라!” 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런데 내실에서 그 소리를 들은 김 권사가 그 가정부를 조용히 불러 성경말씀을 읽어주며 “거지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바로 주님께 행한 것이 된다. 불쌍한 거지를 잘 대접하면 그 복을 자기가 받는 법이다”라고 충고했다. 그 후로 안동댁은 딴 사람으로 변해 걸인들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소문을 들은 밀양의 어느 방직공장 사장이 마침 재혼 상대를 찾다가 그 안동댁을 반려자로 맞이했다고 한다.

활신한의원과 교회당 건축의 소망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된 정규만 장로는 1930년대에 전국 최대의 약령시장이 있는 대구로 이주하였으며 당시 서남교회에서 33세의 나이에 장로 피택을 받았다. 그때쯤 서현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할 기틀이 준비되었는데, 하나님은 정규만 장로가 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무렵 그에게 엄청난 물질의 복을 내려 주셨다.
1940년대 말에 전국적으로 급성 유행병인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그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집집이 죽은 사람이 넘쳐났고 길거리에서도 길 가다가 구토를 하며 쓰러져 죽는 사람들의 주검에 즐비하였다. 하나님께서 정규만 장로에게 특별한 처방을 주셔서 신기하게도 정 장로의 활신한의원에서 지은 약을 서너 첩만 먹으면 다 죽게 된 사람도 툭툭 털고 일어나 멀쩡하게 회복이 되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전국에서 수많은 환자가 몰려 왔고 보건 당국에서도 마땅한 특효약이 없었던지라 정 장로의 약을 임상시험 해 보았더니 큰 효험이 있었으므로 시민에게도 적극 권유하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경북 일대에서 약을 짓기 위해 모인 많은 환자로 활신한의원은 차고 넘쳤다. 환자들이 당일에 약을 짓지 못하고 그 전날 한의원 근처 여관에서 투숙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한의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이 벌어졌다. 이 줄은 약전골목 끝을 지나 제일극장, 지금의 중앙시네마 이전의 아카대미극장 방향으로 길게 이어졌다.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활신한의원은 매일같이 사람들로 복잡하고 북적거렸다. 가족들이 책임을 분담하여 일부는 대기 환자들을 차례로 줄을 세우기에 바빴고 일부는 들어오는 약값을 셀 시간이 없어 자루나 포대기에 담아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 장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의 선물과 더불어 경제적인 축복을 받았고 그의 한의원은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1969년도에 정 장로는 소천하기까지 대구 약령시장에서 제일가는 명의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경제적인 수익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서현교회가 처음 목조 단층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현재의 대지에 크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 장로는 최고의 재료로 아름다운 주님의 집을 건축할 수 있도록 주님께 서원 기도를 올렸고 자신의 경제적인 부를 교회당 건축을 위해 사용할 것을 결심했던 터였다. 그 시절에 그런 규모로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믿음의 자녀들
생전에 정규만 장로 부부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정신을 확고하게 교육하였다. ‘신본사상, 신전사상, 청지기 사상’을 강조하였고 실천사항으로 하루 3장 이상의 말씀을 읽고, 1년에 한번 통독할 것, 기상, 취침, 식사 때 등 하루 5번 이상 기도를 드릴 것. 매일 찬양을 드리되 찬송가 전곡을 외울 것,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모든 절기 헌금을 빠뜨리지 말 것. 어려운 사람을 돕고 외면하지 말 것.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전도에 힘쓸 것. 항상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단점보다 장점만을 볼 것.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일 성수할 것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정규만 장로가 소천하기 얼마 전 자녀들에게 특별히 남겨 둔 유지가 있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교회 개척과 교회당 건축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 갈 시대는 교회 성장과 세계 선교의 시기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선교에 힘을 쏟아 더 많은 나라와 더 많은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앞장서라.” 자녀들은 지금 모두 서현교회를 떠났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열방으로 나아가 큰 믿음을 행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슬하에 5명의 아들과 1명의 고명딸이 있었다. 3남 정우현 집사는 미국 유학 중 갑작스러운 병으로 젊은 시절에 별세했으며 4남은 정주현 목사인데 현재 선교사로 A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5남 정재현 집사는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충현선교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천마 USA. INC.’의 사장이다. 고명딸인 정명자 집사는 대구의 모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손자녀 중에서도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는데 그중 정순영 선교사는 아프리카 ‘기니’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자녀를 중심으로 8촌까지 백여 명의 가족이 있는데 모두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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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배당 건축에 모든 것 바친 헌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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