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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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새벽, 저는 자주 오르는 산에서 기도 하였습니다. 후두둑 후두둑 가끔씩 알밤 떨어지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들짐승의 발자국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가을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다 마친 후 먼동이 터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놀랍게도 주변은 여기 저기 하트모양의 알밤들로 차려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어지간하면 알밤을 잘 줍지 않고 다람쥐에게 양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밤나무가 이렇게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의 친구가 되어준 당신께 뭔가 선물을 드려야겠기에,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 무릅쓰고 맺은 열매입니다. 저의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물론 제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삿9:8이하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밤을 통하여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포도나무 역시 나무들이 자신에게 왕이 되라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하며 거절합니다(9:13). 자신의 존재 이유가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기쁨의 나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을 포도나무로, 신앙인들을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짓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15:1-2).

 

주님은 기쁨의 나무이고 우리는 기쁨의 가지인 셈입니다. 기쁨의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 기쁨의 가지가 된 신앙인들이 기뻐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라고 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위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사랑할 때 기쁨이 오고 기뻐할 때 힘이 생깁니다(8:10).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옥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바울이 오히려 그를 염려하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기뻐하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4:5). 바로 기쁨은 너그러운 용서 가운데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 꽁한 마음, 혐의를 품을 때 성령과 교통이 끊어짐을 신앙인들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는 죄용서하지 않는 죄인 것입니다.

 

기뻐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는 기쁨은커녕 오히려 영과 육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17: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4:6-7).

 

어떻게 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사랑하며 살고, 관용해야 하며, 염려를 주께 맡길 때 비로소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새 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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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쁨의 나무’(요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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