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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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4주년 8·15 광복절을 올해에 맞고 보내면서 고(故) 정종수 작가의 단편소설 <해방>이란 작품이 특별히 필자의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매우 ‘흥미’ 있는 작품이면서, 또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 작가의 <해방>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4반세기 전이라고 할 1996년에 계간 <농민문학> 가을호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작품 속의 스토리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독자의 흥미를 한껏 유발하는가 하면, 뒤에 가서는 독자들을 깨우치는 강한 힘을 발휘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이기에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1945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단 사흘 동안에 걸쳐 일어난, 어느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을 이야기의 축으로 전개한 농촌소설이다. 얼마 전 일제의 강제징용에 끌려간 주인공 박만수의 아들 정구가 이날(13일) 귀향했다는 낭보가 전해지면서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청년들이 모두 다 죽어서 백골(白骨)로나 귀향하거나, 아니면 아예 종무소식(終無消息)인 채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어떻게 그의 아들 정구가 이렇게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축제의 분위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고작 하루가 지나고 난 바로 다음날(14일) 더 놀라운 일이 새로 벌어졌다. 긴 칼을 찬 검은 양복의 일본 장정이 느닷없이 박만수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박정구 있느냐?” 하고 잠시 호통을 쳤는가 싶었는데, 이에 지레 놀랐던지 아들 정구가 스스로 출두해 순순히 일본 순사 무리에게 끌려가고 말았으니, 정구는 이를테면 도망병 신세였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박만수가 이 사태에 대해 너무도 놀랐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날 밤 정신이 완전히 나간 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박만수는 그러나 다음날(15일) 아침 일찍 어제 모 심었던 논으로 향했다. 이날은 이야기 속의 제3일, 바로 1945년 8월15일 정오(正午)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회관 쪽에서 “대한민국 만세!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들이 들리는가 하면 “해방이다, 해방!” 하는 톤이 높은 부르짖음도 들려 왔다.
이때 박만수는 갑자기 마을회관 쪽을 향해 달려가면서 외쳐대기 시작했다. “해방이다아. 정구야아, 해방이다아!” 이러는 그에게 해방이란 사건은 곧 자기 아들의 석방이었다. 그에게 있어 해방은 무엇보다도 아들의 무사 귀환이란 보다 구체적인 사실과 관련되는 일이었다. 어제 아들이 자기 면전에서 일본 순사들에게 연행됨으로써 먹구름 상태였던 박만수의 얼굴은 바로 하루 뒤인 오늘(15일), 활짝 웃는 해(태양)의 얼굴로 뒤바뀌어진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몇 가지의 축제 행위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카니발적인 성격의 축제는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규정한 이른바 ‘뒤집혀진 삶’, 또는 ‘거꾸로 된 세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민들은 자기들의 축제를 통하여 일제에 대한 평소의 저항의식을 그런 집단유희를 통해 분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그 축제를 통하여 농민들은 일시적이나마 일제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도망병 신세에 불과했던 아들이 귀향했다고 하여 아버지가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일은 확실히 일제 패망의 예조를 보여주는, 일종의 ‘뒤집혀진 삶’의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8·15 해방의 축제를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는 행위 역시 그 집단 연행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음을 실제로 확인하는 행위라고 보겠다.
이 축제 행위는 사회·정치적 장벽이 갑자기 허물어지면서, 지금껏 한국인들을 억압해오던 일본 순사들이나 억압받던 한국 백성들이나 양쪽 모두가 서로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 사실을 자축하고 그 기쁨을 만끽하는 향연이라 하겠으며, 이 집단적인 축제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일상적인 삶을 지배해 오던 사회 질서나 법률, 또는 제도나 관습 등이 모두 중지(종식)되어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천황 제도에 기초한 일본 군국주의를 뒤늦게나마 거역하는 한국 농민들의 오만스러운 축제 행위가 천조대신 숭배에 항거하고 동시에 동방요배나 신사참배도 송두리째 거부함으로써 결국 태양신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열기를 더해 갈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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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축제와 일제(日帝)의 몰락/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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