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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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교회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교회의 개혁파를 ‘위그노(Huguenots)’라 한다. 위그노는 독일에서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이 프랑스 안에 스며든데서 비롯되었다. 1518년 파리 근교 모(Meaux)의 주교인 기욤 브라소네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같은 개혁사상을 가진 르페브르라는 사제를 부주교에 임명했다. 르페브르는 1521년부터 1525년까지 인문주의 동료들과 함께 ‘모 서클’이라 칭하는 개혁모임을 만든 사람이다. 거기에 요한 칼빈(쟝 칼뱅)을 제네바 개혁에 동참시킨 기욤 파렐이 있었다. ‘모 서클’이 1524년 신약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자 파리 소르본느 신학대학은 이를 이단서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의회가 나서서 브라소네 주교를 루터파 이단으로 비판했다. 이에 프랑스어 성경은 금지되고, 브라소네 주교는 개혁에서 손을 떼고 ‘모 서클’은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루터의 저술과 쯔빙글리나 다른 개혁자들의 책들도 프랑스에 소개되어 읽혔다.
◇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벌금에 처하거나 투옥하거나 화형시켰다. 그리고 1546년 ‘모’에 최초의 위그노 교회가 설립되었으나 그 해 당국의 검색을 받아 예배 중에 62명이 체포되고 그 중 14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그 해 10월 8일 공개적으로 화형당했다. 그로부터 2년동안 파리의회는 500명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투옥하고 그 중 68명을 사형시켰다. 그로부터 끊임없이 박해가 시작되다가 1572년 8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날이 마침 성 바돌로매 축일이어서 ‘바돌로매 대학살’이라 부른다. 이 날 파리에서 희생된 위그노만 1만2천여명으로 추산된다. 그 후 대학살은 여러 도시로 확산되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체포되어 노예로 전락하고 남자는 양 발에 착고를 찬 채 갤리선의 노잡이가 되어 죽어갔다. 비무장을 주장해 온 위그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족군에 합류하여 왕과 주교의 군대인 가톨릭군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프랑스는 끝없는 종교전쟁에 휘말렸다. 이 후, 처음에는 자신도 위그노 신앙을 가졌으나 프랑스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간 앙리 4세가 1598년 4월, ‘낭뜨 칙령’을 통해 위그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으나, 이 칙령도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의 ‘몽텐폴로 칙령’에 의해 취소되고,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수 많은 위그노들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근의 종교자유가 허용된 나라로 이민을 떠났다.
◇프랑스 개혁파 위그노는 오늘날 세계교회가 ‘장로교’라고 부르는 칼빈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국교회는 약 70%가 장로교이다. 이 개혁파 신앙은 그냥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 지켜온 신앙의 자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혹독한 고난 속에서 박해를 통과한 위대한 신앙이 한국교회에서 그 성결성과 전투력을 잃고 기복주의로 변질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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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개혁파 ‘위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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