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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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17:16).

 

아덴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그곳은 신전이 많은 곳입니다. 희랍신하에 등장하는 신들로 가득하였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각종 신들과 우상을 위한 신상들이 거리, 광장, 마을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화니, 문명이니 하며 감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울은 달랐습니다. 속에 의분이 솟구쳤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을 탄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나님의 심정으로 책망할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술사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거금을 주고 그를 초청한 모압왕 발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이스라엘이 망하는 법을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음행이었습니다. 모압왕은 발람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25:1~3).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시작되었고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염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스라엘 한 족장이 모세와 온 이스라엘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백신으로 전염병이 그친 것이 아니라 죄를 처리하니까 전염병이 그친 것입니다(25:6~9).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25: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더러운 속성의 질투가 아니라, 부모가 타락한 자녀를 대할 때 안타까워하고, 탄식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비느하스 정신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비느하스 후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된 여로보암이, 다윗의 행함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왕상11:37~38)을 끝까지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마음이 돌아서서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까 두려워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를 두었습니다.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선지자의 강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곳 벧엘에 늙은 선지자가 있는데도 그 선지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 유다 땅에 있는 선지자를 북왕국 이스라엘에까지 오게 하여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합니다(왕상13:1~3). 그 이유는 벧엘에 사는 선지자의 심상한 마음 때문입니다. 금송아지를 보고도 그는 전혀 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멀리 유다에 있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두 금송아지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탔습니다. 바울처럼 분이 일어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대하여 분이 가득한 유다의 선지자를 쓰신 것입니다.

 

9:4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라고 말합니다. 성읍 중에 모든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가증한 문화에, 풍조에 동요되어 같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가는 그런 사람을 쓰실까요?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것은 결코 숫자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땅에 일어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울며 전하는 사람은 듣는 수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쓰신 것도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13:21~22). 그가 골리앗을 죽인 이유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쓰신 이유도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지금도 하나님께서 찾아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은 탄식하며 우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1:8).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칫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고, 하나님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 마음은 탄식과 긍휼과 사랑과 겸손(2:5~11) 등이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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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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